1. 시작하는 말
붓다가 말씀하시길
“그대들이여, 전 우주는 6피트 길이의 몸과 마음 안에 들어 있다.”
코로나19의 팬데믹(pandemic) 쇼크는 우리를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게 만든다. 이에 인간존재는 ‘코로나 사피엔스’라는 새로운 인류로 정의된다. 각 개인은 이제 홀로 고립되기도 격리되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혼자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지금은 새롭게 변화해야 할 시기인 것만은 확실하다. “마음 자세를 바꿔야 할 때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산이다.” 사회와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서로가 안전한 공동체로 연대해 갈 수 있다. 붓다의 명상철학은 이러한 뉴노멀시대의 해체와 재건에 대한, 소외가 아닌 단단한 독립에 대한, 격리가 아닌 내면의 면역력을 높이는 ‘오래된’ 처방전이다. 따라서 본고는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통찰을 돕는 붓다의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a)와 느낌에 대한 관찰을 강조하는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를 통해 위빠사나 명상의 힘을 고찰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울러 문학치료와 표현예술치료에 있어서의 몸의 관찰에 대한 치유적 가치를 살펴본다.
우리 몸은 여러 차원에서 각기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느낌이란 무엇이며, 느낌은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느낌은 몸과 마음과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는가? 초기불교에서 느낌(vedanā)은 오온의 두 번째 요소이며, 12연기(the paṭicca samuppāda)의 7번째 연결고리로, 집착이 생겨나도록 이끄는 조건이다. 또한 즐거움(sukha), 괴로운(dukkha),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adukkhamasukha), 정서적 분위기를 느낀다는 의미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에게 느낌은 어떠한 대상에 반응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슬픔과 기쁨이라는 협의의 정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신체와 마음 그 둘의 경계에 위치하는, 우리 정신의 표현이자 존재의 상태를 알리는 몸의 현상이다.
2. 마음의 기초로서의 느낌
팔리어 느낌(vedanā)의 어근인 √vid는 ‘알다’ 또는 ‘경험하다’의 두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느낌은 아는 과정의 감정적인 측면,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느낌의 정서적인 역할로 인해 느낌(feeling)은 정서(emotion)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정서를 의미 하지는 않으며 “느끼는(vedayati) 특성 때문에 느낌(受, vedanā)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정서를 신체에 속한 현상으로, 느낌을 사고에 속한 현상으로 구분한다.
2.1 느낌이란 무엇인가?
신경과 의사이자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느낌은 생명체 내부의 생명 상태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느낌의 기능을 강조한다. 그는 느낌을 구성하는 심적 내용, 성분, 재료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붓다의 제자 아난다 역시 스승에게 느낌에 대한 네 가지 질문을 던진다. (1)느낌이란 무엇이며, (2)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3)느낌의 소멸을 이끄는 방법 (4)느낌의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에 대해서 묻는다. 제자의 질문과 스승의 답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느낌입니까?”
[세존] “아난다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2) [아난다] “어떤 것이 느낌의 일어남입니까?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입니까?”
[세존] “감각접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3) [아난다] “어떤 것이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세존]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가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지킴, 바른 삼매이다.”
(4) [아난다] “어떤 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며 위험함이며 벗어남입니까?”
[세존] “느낌으로 인해서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의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길들이고 욕탐을 제거하면, 이것이 느낌으로 부터 벗어남이다.”
(1)의 대답에서의 세 가지 느낌은 각각 탐진치의 잠재성향을 지닌다. 청정도론에서는 느낌의 종류(jāti)를 세 가지, 즉 유익한 것(kusala, 善), 해로운 것(akusala), 유익함과 해로움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abyākata, 無記)으로 설명한다. 위의 아난다와 붓다의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붓다의 몸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관점과 비교하여 살펴보자.
2.2 항상성의 대리인으로서의 느낌
인간은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느낌은 일종의 생명의 유전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항상성(homeostasis)은 생명을 최적의 상태로 조절하는 도구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느낌이 바로 이러한 항상성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한다.
아난다의 첫 번째 질문은 느낌의 개념에 대한 물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느낌은 신체의 특정 상태에 대한 지각인 동시에 사고의 특정 방식, 그리고 특정주제를 가진 생각에 대한 지각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느낌의 종류가 달라지는 근거를 항상성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항상성이란 “생명체의 조절과 조절 받은 삶의 상태”를 의미한다. 느낌은 각 생물 개체의 마음에 그 생물의 생명 상태를 드러낸 것이다. 그 상태는 긍정적인 상태에서 부정적인 상태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항상성이 부족한 경우 대개 부정적인 느낌이 표출된다. 느낌은 항상성의 상태를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느낌은 어떠한 대상에 반응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슬픔과 기쁨이라는 협의의 정서로 나타난다. 느낄 수 있고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 그러한 반응은 고통스럽다 또는 즐겁다라고 표현된다.
아난다의 두 번째 질문은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즉 느낌의 구성 원리에 대한 질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에 따르면 느낌은 “뇌의 신체지도(body map)화된 내면 세계의 이미지이다.”이다. 일어나는 혹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은 신경계를 통해 이미지화되고 뇌에 지도화되어 우리의 마음을 구성한다. 이러한 신체지도화에서 가장 큰 역활을 하는 신경계의 가장 큰 특징은 신경 세포인 뉴런이 축삭돌기(axon)의 전기자극을 통해 축삭 말단의 신경전달 물질(neurotransmitter)을 방출하여 또 다른 뉴런이나 근육세포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뉴런의 세포체에서 나온 신경섬유, 즉 축삭돌기가 각각의 신체 내부기관, 혈관, 근육, 피부 등 몸의 전 영역에 뻗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왕복, 쌍방향으로 운동을 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지도화 능력과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을 때 느낌이라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작용 역시 일어날 수 없게 된다.”고 설명한다.
아난다의 세 번째 질문은 느낌에 대처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으로 해석된다. 이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를 제시한다. 라틴어 ‘코나투스’는 “각각의 존재는,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한, 존재하는 상태로 버텨내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붓다와 예수, 노자, 장자와 같은 이들의 철학이 고통을 벗어나 보려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코나투스를 통해 마음을 풍부하게 하기를 권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생성시킨 것이 바로 항상성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느낌이라고 설명한다.
아난다의 네 번째 질문은 느낌이 초래하는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우리 몸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신호들의 원천을 세 부분으로 단순화하여 설명한다. 첫 번째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이고 둘째는 우리 내부의 두 세계 중하나로, 화학적이고 내부 장기가 관여하는 오래된 내부 세계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느낌이라고 부르는 이미지의 생성에 주로 기여한다. 셋째는 또 다른 우리 내부의 세계로 새로운 내부 세계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구조에 관한 전반적인 이미지를 마음에 전달하고 느낌의 형성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내부세계에서 이미지들은 수정되거나, 추가되면서 마음의 작용이 풍부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내부의 두 세계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느낌은 달콤해질 수도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느낌을 유도하는 대상, 그리고 느낌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고 또는 사고방식들을 분리해서 바라볼 때 느낌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3. 살아 있는 몸과 마음의 메커니즘(mechanism)
안토니오 다마지오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몸과 신경계 그리고 그 둘로부터 생성된 마음을 지닌 존재이다. 이러한 우리 몸은 여러 차원에서 각기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몸과 마음과 느낌은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는가? 초기경전인 대념처경(Mahasatipaṭṭhāna Sutta, DN.22)에 나타나는 살아 숨쉬는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3.1 느낌이라는 경험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붓다는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a)를 통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이야기 한다. 이는 “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anupassanā)’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난 마음지킴의 확립이다. 각각의 대상들에 내려가고 들어가서 확립하기 때문에(upaṭṭhāto)” 확립(aṭṭhāna)이며, 마음지킴 그 자체가 확립이기 때문에(sati yeva aṭṭhānaṃ) 마음지킴의 확립(念處)이라고 한다.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서 그들을 더러움, 괴로움, 무상, 무아라고 파악하면서, 또 깨끗함, 행복, 항상함, 자아라는 인식(saññā)을 버리는 역할을 성취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네 가지 마음지킴의 확립(四念處)이다.” 인경 스님은 『대념처경』(DN.22)의 전체 내용을 현대의 논문작성의 형식과 유사하게 ‘Ⅰ. A, E1’ 3개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I. 몸을 따라 관찰 Kāyānupassanā
A. 호흡 Ānāpāna Pabba
B. 행주좌와 자세 Iriyāpatha Pabba
C. 동작 Sampajāna Pabba
D. 해부학 Paṭikūlamanasikāra Pabba
E. 4대 Dhātumanasikāra Pabba
F. 시체 Navasivathika Pabba
II. 느낌을 따라 관찰 Vedanānupassanā
III. 마음을 따라 관찰 Cittānupassanā
IV. 법을 따라 관찰 Dhammānupassanā
A. 오장 Nīvaraṇa Pabba
B. 오온 Khandha Pabba
C. 육근 Āyatana Pabba
D. 칠각지 Bojjhaṅga Pabba
E. 사성제의 절 Sacca Pabba
E1. 고 Dukkhasacca Niddesa
E2. 집 Samudayasacca Niddesa
E3. 멸 Nirodhasacca Niddesa
E4. 도 Maggasacca Niddesa”
이러한 사념처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法]’이 따로 분리되어 관찰되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함께 경험된다. 즉 육입(The six entrances)의 접촉에 대해 느껴지는 내부 경험과 지각되는 생각들과 심리현상들에 대해 관찰한다. 이들을 있는 그대로 봄(yathābhūta-dassana, 如實見)으로써 두 번째 화살인 정신적 고통(domanassa)과 그것을 이끄는 괴로운 느낌의 실체 없음(無我)을 통찰하게 된다.
“무엇이 위빠사나의 힘인가? 무상의 관찰이 위빠사나의 힘이다. 눈을 가진 자들만이 [이것을] 본다. 어떻게 눈을 가진 자들만이 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존재(bhūta)를 존재 그대로(bhūtato) 본다. 이와 같이 이 정신·물질도 공하고, 생명이 없고, 관심도 없지만 서로서로 결합하여 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호기심과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알아야 한다.”
사념처의 내용과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관점을 종합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붓다에게 몸은“soma 즉, 물리적 영역으로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조화를 이루는 몸”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에게 몸은 신체와 신경계 그리고 그 둘로부터 생성된 마음을 의미한다. 붓다에게 몸은 정신과 물질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쌍둥이다." 신체와 마음은 이처럼 서로를 조건으로 모방하며 닮아간다. 이와 같은 몸과 마음의 신체도식은 상향식(bottom-up)과 하향식 처리(top down)의 두 과정으로 서로 상호 작용한다.
숫파니파타(Sutta Nipāta)와 사념처의 신념처에서는 몸(kāye)에 대해 상세히 설명된다. 몸은 모두“뼈와 힘줄로 연결되어 있고, 내피(內皮)와 살과 살갗으로 덮여져 있어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다” 또한“살갗으로 둘러 싸여진 신체 각 부분들의 집합이며, 사대와 사대로부터 파생된 물질의 덩어리”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에게“몸은 피부(skin)라는 경계로 외부와 구분되는(fenced) 한 덩어리의 자연이다.” 이처럼 붓다와 안토니오 다마지오에게 인간은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살(the flesh)로 있다. 우리는 살을 통해 지각하기도 하고 지각되기도 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이러한 살 속에서 모든 현상은 느낌으로 모이며 육입처에서 일어난 즐거운, 괴로운 느낌은 신체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이에 고통과 쾌락,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온갖 느낌(feeling)들은 우리 마음의 토대를 이룬다. 앞서 설명된 오래된 내부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바로 우리의 느낌을 구성하는 요소로, 뼈로 이루어진 골격과 뼈에 붙은 근육, 즉 골격근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오래된 내부 세계가 자리 잡고 있는 전체적인 뼈대에 해당되는 신체 골격은 오래된 세계에 속하는 피부에 둘러싸여 있다. 피부는 우리 몸의 장기 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며 전체적인 신체 골격은 감각의 관문(sensory portals)이 위치한 무대이다.
3.2 몸과 마음 그리고 느낌의 자리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정서의 무대는 몸(신체)이고 느낌의 무대는 마음”이라고 정리한다. 느낌은 신체와 마음 그 둘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사념처와 오온에서 역시 느낌의 자리는 각각 신(身)과 색(色)의 다음에 위치하고 있다. 경전 상에는 그 순서가 상세히 설명되고 있지 않지만 몸의 상호작용적 운동, 몸과 마음의 쌍방향 운동의 속성을 고려하면 느낌의 위치가 확실해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외부 세계에 대한 관점의 형성 과정 이면에 이미 형성된 기존의 호불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충분한 논리와 생각이 작용하며, 즐거운 혹은 즐겁지 않은 느낌의 생성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나 사유들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이다. 다음에서 설명되는 마두삔디까경(Madhupiṇḍika Sutta)과 삭카빵하경(Sakkapañha Sutta)은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두삔디까경(Madhupiṇḍika Sutta)에서 한 수행승은 붓다에게 망상에 [오염된] 지각(想)과 관념(papañca-saññā-saṅkhā)이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을 묻는다. 붓다는 그것의 발생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벗이여, 눈(眼)과 물질현상(色)을 조건으로 눈에 의한 의식(眼識)이 발생한다. 셋의 부딪힘이 접촉(觸)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가 있다. 느끼는 그것을 그는 지각한다(想). 지각하는 그것을 그는 생각한다(尋). 생각하는 그것을 그는 망상한다(戱論). 망상하는 그러한 이유로 그 사람에게 망상에 [오염된] 지각(想)과 관념이 생긴다. [또한 그 사람에게]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눈으로 인식되는 물질현상에 대해 [망상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생겨난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의식(識, viññāṇa) → 접촉(觸, phassa) → 느낌(受, vedanā)→ 지각(想, saññā) → 생각(尋, vitakka) → 망상(戱論, papañca) [오염된] 지각(想)과 관념의 순서가 된다. 그런데 삭카빵하경(Sakkapañha Sutta)에서는 그 순서가 반대로 설명된다. 이것에 대해 윤희조는 ‘망상(戱論, papañca)에 [오염된] 지각(想)과 관념’이 다시 사유와 망상의 대상이 되는 순환구조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는 몸과 마음의 유기적 관계에서 우리 내부의 양방향성의 순환적 구조를 제시하는 것으로 계속적인 자기 생산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지는 부분이다. 또한 위의 순서에서 의식 → 접촉 → 느낌의 과정에서는 인칭적 서술이 등장하지 않고(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반대 방향 즉, 지각 →생각 → 망상까지는 “느끼는 그것을 그는 지각한다(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라는 방식으로 3인칭 동사가 사용된다. 이에 대해 임승택은 전자를 비인칭적 인식으로, 후자를 인칭적・주관적 인식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안토니오 다마지의 관점에서 정리해보면, 비인칭적 운동을 하는 것은 오래된 내부 세계이고, 인칭적 운동을 하는 것은 새로운 내부 세계이다.”전자는 기초적인 항상성과 관련된 부분이고, 후자는 주관성의 형성에 아주 중요한 단계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살아있는 우리의 몸은 의식적(인칭적), 무의식적(비인칭적) 순환운동을 한다. 양자는 서로 관계하며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이는 메를로 퐁티의”습관적인 몸의 층위(une couche du corps habituel)와 현실적인 몸의 층위(une couche du corps actuel)"의 개념과 비교될 수 있다.그는 전자를 비인칭적 실존으로, 후자를 인칭적 실존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게 유기체로서의 몸은 이 둘의 실존이 결합되어 있는 장소이다.
“몸은 세계에의 존재의 수레(le véhicule de l’être au monde)다. 생물체에 있어서 몸을 갖는다는 것은 규정된 환경과 결합한다는 것이고, 어떤 기획[투사]들과 혼용되는 것이고, 그 기획들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우리의 몸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경험해나간다. 이 과정의 한가운데에 ‘느낌’이 기능하며, 마음을 구성하는 기초가 된다. 이렇게 구성된 마음은 체화(embodiment, la incamation)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는 쌍둥이인 것이다. 이것은 “실존의 운동에서 매순간 이루어진다.”
4. 치유도구로서의 느낌
“기쁨과 슬픔 그 어느 하나라도 거부한다면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둘 다에게 ‘네’라고 말해야 한다.”
4.1 명상실천을 통한 느낌
붓다의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自燈明法燈明 歸依法歸依)’는 바로 ‘사념처’를 의미한다. “이 사념처는 마음지킴과 위빠사나(vipassanā)를 닦는 완전한 수행 체계”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렬함(ātāpī)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a)’과 ‘마음지킴(念, sati)’이 요구된다.
‘알아차림(知)’이란 편견이나 왜곡됨이 없이 몸으로 일어나는 현상, 느낌으로 일어나는 현상 등을 ‘있는 그대로(如如, yathātaṁ)’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일상 생활의 모든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이 대상이 되며 몸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 모두에 대해 집중하며 하나의 현상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알아차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비구의 알아차림(知)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알아차림(知)으로 행한다. 볼 때나 관찰할 때 알아차림(知)으로 행한다. 구부리거나 펼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겉옷과 발우와 옷을 착용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먹거나 마시거나 먹고 난 이후에나 맛을 볼 때나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이야기할 때에나 침묵할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곧 비구의 알아차림이다.”
이처럼 붓다는 경전을 통해 마음지킴과 알아차림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당부한다.’마음지킴(念)‘이란 마음을 현재의 상태로 되돌리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 몸의 현상을 향해 ‘마음을 되돌리는 것’ 그래서 잊지 않으려는 적극적 의지를 의미한다. 『청정도론』은 이러한 마음지킴이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청정도론ⅪⅤ]: “141. 이것 때문에 지키고(saranti),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지키고, 혹은 단지 지키기 때문에 마음지킴(sati)이라 한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asammosa)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ārakkha)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visaya-abhimukka-bhāva)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thira-saññā)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한 마음지킴의 확립(sati-paṭṭhāna)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있기 때문에,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의 자세로 감지되는(viditā)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을 따라가면서(anupassan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vineyya) 머물고(viharati), ‘몸, 느낌, 마음, 법이 있구나’를 바르게 알고(pajānāti, know), 익히는(sikkhati, train) 것이 위빠사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경전 그대로의 명상법이 미얀마에서는 명상센터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필자는 한 달간의(2019년 12월 20일~ 2020년 1월 12일) 명상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매 순간의 알아차림과 사띠의 일상에서는 걱정과 두려움에 대면할 겨를이 없었다. 또한 음식이 소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향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의 맛과 색과 향기의 변화는 마치 생생한 동영상 같았다. 진화 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는 이와 같은 위빠사나의 체험에 대해 “지금 일어나는 일에 더 명료하고 차분하게 ‘덜 반응적인(less reactive) 방식’으로 관찰하게 되는 것”이라고 자신의 경험을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느낌에서 갈애(taṇhā)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위빠사나 명상은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러한 위빠사나의 가치는 현재 국내에서도 다양한 명상센터를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4.2 느낌에 대한 메타해석
독일의 통합문학치료(Integrative Poesie-und Biblitherapie)의 창시자 오르트(Ilse Orth)는 “메타해석이란 ‘이해하는 것을 넘어 포용과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한다. 어떤 뉴스를 볼 때, 이 뉴스가 무슨 뜻이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면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하는 힘을 키우는 ‘메타적 자기 성찰(meta reflection)’이다. 현대의 우리에게는 붓다의 명상철학에 대한 메타해석이 필요하다. 인간은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붓다는 이러한 실존적 몸을 스스로 극복해보고자 고민하였을 것이다. 고통을 이끄는 느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 볼 것인가? 메타적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명상실천을 통한 느낌은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지혜”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힘이다. 위빠사나는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는가? 필자는 그 답을 문학치료와 표현예술치료의 철학을 통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문학치료는 도입, 작업, 통합, 새 방향 설정이라는 4단계를 통해 몸으로써(with) 습관화된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오르트는 이러한 문학치료의 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느껴보세요’라는 것은, 몸(내부)에서 밖으로(표현으로), 그리고 다시 외부로부터 몸(안)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느껴보라는 의미입니다.”여러분의 몸속에서 어떤 느낌이 느껴지나요? 지금의 느낌을 적어보세요.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느낌, 혹은 그 반응들을 형용사로 표현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몸은 외부적 자극이나 순간적 상황이 만들어내는 즉흥적 정보들을 인지하는 순간, 반응한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정보가 되어 몸으로 들어가 반응을 불러오고 이 반응은 다시 정서에서 인지영역으로 상향식-하향식(top down-bottom up) 순환을 통해, 다시 몸에서 내부로 흐르며 창의적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 에너지는 우리 내부에 잠재해 있는 문학적 치유력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도와 자신을 표현하고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로서 이야기 할 수 있게 한다.
다리아 할프린(Daria Halprin)의 타말파(Tamalpa)작업은 몸의 느낌을 치유도구로 하는 동작 중심의 표현예술치료(movement-expressive arts)이다. 이들에게 몸은 알아차림의 매개체(vehicle)이다. 몸의 감각, 자세, 몸짓은 역사와 문화, 현재적 존재 방식의 반영으로 예술이 가진 창조성의 원리와 실제를 배워감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그것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의 핵심 철학은 삶의 경험들의 전체적인 이야기(repertoire)들은 움직이고 있는 몸을 통하여 접근될 수 있고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작은 몸의 원초적 언어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우리를 깊은 느낌과 기억을 환기시키고, 움직이는 방식 또한 우리의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패턴들을 드러나게 한다. 우리 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절망, 혼란, 불안, 화, 즐거움-은 동작을 통해 표현될 때 나타나며, 동작이 온전한 표현으로 지각되고 해석될 때, 통찰과 변화를 위한 매개체가 된다. 심리학자 매슬로 역시 “현재에 몰두하는 능력은 모든 종류의 창조 활동의 필수요소”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빠사나는 살아있는 다양한 몸의 느낌에 대한, 붓다의 문학이며 철학이 닮긴 동작이며, 창조 활동이다. 이는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삶을 수용하는 자세이다. 그렇기에 “기쁨과 슬픔, 그 둘에게 ‘네’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러한 위빠사나의 메타적 해석은 우리 삶을 예술작품처럼 풍성하게 만들고 어떠한 위기와 혼란의 상황에서도 스스로 “발 디딜 곳을 찾아내는, 참으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의 길로 이끌 것이다.
5. 마무리
이상과 같이 필자는 느낌을 중심으로 붓다의 위빠사나명상과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신체도식의 관점과 비교하여 고찰해 보았다. 종합하면 마음과 조화를 이루는 우리의 몸은 여러 차원에서 각기 다른 느낌을 갖게 되고, 모든 현상은 느낌으로 모여 마음의 기초가 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에게 느낌은 신체의 특정 상태에 대한 항상성의 대리인이며 붓다에게 느낌은 좋아함(快)과 싫어함(不快)에 대해 욕망(abhijjha)과 불만족(domanassa)을 유도하는 것이다. 느낌의 호불호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위는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이러한 느낌에 직면하고, 물러나고, 벗어나 느낌의 특성과 그 내용을 통찰하는 체험이다. 바로 이것이 위빠사나의 힘이다. 이러한 체험은 신체와 정신의 균형 잡힌 자기면역력이 될 것이다. 이는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자신만을 의지처로 삼는 자가치유법이다. 이렇게 단련된 각 개인의 정신건강은 또한 단단한 연대의, 튼튼한 공동체를 만든다. 이것은 문학치료와 표현예술치료가 지향하는 치유의 목표이기도 하다. 또한 이 셋은 “기존의 상담심리치료와는 달리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의 주체가 치료자가 아닌, 내담자에게 주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인간 존재의 왜소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드러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느낌”이라 말한다. 위빠사나 명상은 “혼자 힘으로 자신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길(道)”이다. 유발하라리는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물으며, 스마트폰과 같은 기술문명이 눈 멀게 한 우리의 몸에 대해 “오직 관찰하라”고 제안한다. 문학치료와 동작 중심의 표현예술치료의 대가들은 몸은 우리를 통찰과 변화로 이끄는 매개체라고 말한다. 이러한 몸의 느낌은 소비가 아닌 충전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는 느낌이 초래하는 현상들과 거리를 두고 느낌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위빠사난 명상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며 ‘더 나은 오늘’에 대한 실천적 대안이 될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붓다의 명상철학을 우리 삶에 좀 더 가깝게 가져와 우리의 생활방식과 삶의 철학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이론과 실제에 관한 탐구이다. 이는 명상철학의 외연확장 및 통합학문으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유의미한 작업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기반으로 붓다의 인간이해를 위한 명상철학에 대한 연구된다.
Footnote
1) 최재천 외(2020), 참고.
2) 앤서니 스토(2018), 53쪽.
3) 오온(DN22); 색(色,form)·수(受feeling)·상(想perception)·행(行mental formation)·식(識consciousness), 12연기(경전인용SN);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4) Anālayo, 『Encyclopaedla of buddhism』 vol. ⅷ. p. 513.
5) 붓다고사(2015), 44쪽.
6) Antonio Damasio(2015), 13쪽.
7) Antonio Damasio(2019), 12쪽.
8) Antonio Damasio(2015),101쪽.
9) SN36:15, 상윳따니까야 4(2018), 454~455쪽.
10) 상윳따니까야 4(2018), 430쪽.
11) 붓다고사(2004), 458쪽.
12) 항상성 이면에 있는 개념을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이다. 그는 살아 있는 생명 시스템은 그 내부 환경 속의 다양한 변수들을 줄여야만 생명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부환경(internal milieu)은 상호작용하는 많은 수의 화학적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학작용들은 각 조직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 공급원(물, 영양분, 산소)을 에너지로 변환시킨다. 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용어 자체는 클로드 베르나르의 시대 이후 미국의 생리학자 월터 캐넌(Walter Cannon)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그리스어 homo(똑같은) 대신 homeo(비슷한)’을 사용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미구엘 아온Miguel Aon과 데이비드 로이드David Lloyd가 만든 ‘항동성(homeodynamic, 평형역동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을 선호한다. (Antonio Damasio(2015), 73~75쪽).
13) Antonio Damasio(2015), 103~104쪽.
14) Antonio Damasio(2003), p.31.
15) Antonio Damasio(2003), p.44.
16) 이러한 뇌의 신체지도와 관련하여 G.레이코프와 M. 존슨은 “현상학적 신체화(phenomenological embodiment)”로 정의한다(조지 레이코프(2002), 73쪽), 특히 M. 존슨은 이 개념을 ‘도식(schemata)’이라는 용어로 기존의 인지과학적 의미와 구분시키고 있음을 밝히는데 이 의미의 기원을 칸트에 둔다(M.존슨(2000), 89쪽), 메를로 퐁티는 신체 도식(schéma corporel)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몸틀’로 번역된다. (메를로 퐁티(2002), 166쪽).
17) Antonio Damasio(2019), 81~82쪽.
18) Antonio Damasio(2019), 87~90쪽.
19) Antonio Damasio(2019), 53쪽.
20) Antonio Damasio(2019), 55쪽.
21) Antonio Damasio(2019), 135쪽.
22) Antonio Damasio(2015), 41쪽.
23) Antonio Damasio(2019), 119~120쪽.
24) Antonio Damasio(2015), 103쪽.
25) Antonio Damasio(2019), 94쪽.
26) paṭṭhāna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된다. 하나는 pra(앞으로)+√sthā(to stand)에서 파생된 중성명사로 취급해서 ‘출발, 시작, 개시, 근원’등의 뜻으로 간주하고 또 다른 하나는 upa(위로)+√sthā(to stand)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인 upaṭṭhāna(돌봄, 시중 듦, 확립 등의 뜻이 있다)가 sati와 합성되면서 ‘u-’가 생략된 것으로 파악된다. 『위바위니 띠까』는 전자로 설명하고 있지만(paṭṭātī tipaṭṭhānaṃ) 경에 또는 ‘upaṭṭhita-sati(D16, M4, A3:113 등) 등으로 나타나고 있고 『청정도론』에서도 후자로 설명하고 있다. (대림, 각묵(2017), 135~136쪽.)
27) 붓다고사(2015), 359쪽.
28) 인경(2020), 3~4쪽.
29)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육입(六入)이라 한다. 육처(六處) 또는 이들을 합하여 십이입(十二入) 또는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른다. 이는 정신활동이 일어나는 여섯 가지 영역과 대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장(場)으로, 육근(六根)은 눈, 귀, 코, 혀, 몸, 뜻(意) 등의 안쪽 영역을, 육경(六境)은 빛깔, 소리, 냄새, 맛, 접촉, 사물 등과 같은 바깥 영역을 의미한다.
30) 붓다고사(2015), 188쪽.
31) 붓다고사(2015), 409쪽.
32) 붓다고사(2015),189쪽.
33) 붓다고사(2015), 190쪽.
34) 리처드 슈스터만(2010), 25쪽.
35) 붓다고사(2015), 191쪽.
36) 오세진 외(1999), 71~94 참고.
37) 숫파니파타, 1장, 11. 신체(육체)의 가르침.
38) 디가니까야 2권(2018), 495쪽.(각주 509, 510 참고).
39) Antonio Damasio(2003), p.210.
40) A8:83 ‘chandamūlakā, āvuso, sabbe dhammā, manasikārasambhavā sabbe dhammā, phassasamudayā sabbe dhammā, vedanāsamosaraṇā sabbe dhammā, samādhippamukhā sabbe dhammā, satādhipateyyā sabbe dhammā, paññuttarā sabbe dhammā, vimuttisārā sabbe dhammā’ti,
41) Anālayo, p. 515.
42) Antonio Damasio(2015), 7쪽.
43) Antonio Damasio(2019), 112쪽.
44) Antonio Damasio(2015), 38쪽.
45) Anālayo, p. 517.
46) 주석서에서 papañca는 “취하고(matta) 방일한(pamatta) 모습에(ākāra) 다다른다”는(pāpana) 뜻으로 풀이된다. 희론(戱 論)으로 한역되기도 한다.
47) M18 (M.Ⅰ. 111-2) Cakkhuñcāvuso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 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takketi, yaṃ vitakketi taṃ papañceti, yaṃ papañceti tatonidānaṃ purisaṃ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 atītānāgatapaccuppannesu cakkhuviññeyyesu rūpesu (Madhupiṇḍ ika Sutta), (맛지마니까야 제1권(2002), 392 쪽, 맛지마니까야1(2012), 490~491쪽. 참고.)48) D21: 삭까빤하 숫따, 이를 직역하면 제석(帝釋)이다. 신들의 왕 삭까는 붓다에게 질투ssā(i)와 인색(macchariya)의 근원 (nidhāna)에 대해 묻는다. 본경을 통해서 삭까는 예류자가 된다. (디가니까야2(2018), 443~488쪽. 참고).
49) 윤희조(2006), 164쪽.
50) 임승택(2012), 250-251쪽.
51) Antonio Damasio(2019), 110~114쪽.
52) 조광제(2012), 113~117쪽.
53) Maurice Merleau Ponty(1945), p.97, (재인용: 조광제(2012), 111쪽.)
54) Maurice Merleau Ponty(1945), p.105, (재인용: 조광제(2012), 123쪽. 참고)
55) DN. vol.2. pp. 100-101; DN. vol.3. pp.58, 77; 『長阿含經』, 권2, 大正新修大藏經, 제1권.열반에 드시기 3개월 전에 ‘만약 부처님께서 입멸하신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라는 아난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이다.
56) 아비담마 길라잡이2(2017), 136쪽.
57) DN. vol.2. p290. Katame cattāro?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ɱ --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ɱ --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ɱ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ɱ.
58) SN36:7; 디가니까야2(2018), 439~440쪽 참고.
59) 임승택(2004), 192쪽.
60) apilāpana(nt.)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는 api+√lap(to prate, to speak)에서 파생된 명사로 간주하여 ‘헤아림, 반복 함’의 뜻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지킴은 반복해서 거듭 챙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둘째(부는정 a접두어)+√ plu(to fol at)에서 파생된 명사로서’[물 위로] 둥둥 떠다니지 않는 것(DhsA.147)’으로 대상의 주의로 맴돌지 않고 대으상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2(2017), 258쪽.)
61) 아비담마길라잡이1(2017), 258~259쪽.
62) 로버트 라이트(2019), 35쪽.
63) ‘갈애(渴愛)’라 번역되는 atṇhā는 √tṛṣ (목마르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PED에서 i‘tl. drought, thirst; figuratively, craving, hunger for, excitement, the fever of unstaisfied longing.’이라 설명되듯이, 문자적으로 타는 목마름이나 갈 증을 뜻하며 비유적으로 쓰여서 ‘자극에 대한 갈망과 갈애, 채우지 못한 열망의 열병을 뜻한다. 즉 목마른 사물람을이 찾 을 때 의 강렬한 욕구와 유사하게 감각대상들을 애타게 구하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하며, 끊임없는 재생을 일으키는 마 상음의 태이다.
64) 로버트 라이트(2019), 291쪽.
65) 한국의 고엔카 공식 센터는 ‘전북진안 담마코리아’ 고엔카 수행법을 지도하는 센터인 ‘경북 상주 마음 닦는 마른을 누푸리 수행처’가 있고, 마하시 수행센터로는 ‘안양 한국 마하시 선원’(천안호두마을), 한국 테라와다 불교 ‘울주 붓 다길의따라 선 원’, ‘양평 빤띠따라마 한국분원’, ‘과천 보리수 선원’, ‘삼청동 자애통찰명상원’ 등이 있다. 파욱 수행센는터 로‘부산 기장 세 나니 선원’, ‘거창 붓다선원’, ‘양산 깨달음 명상선원’, ‘서울향천선원’, ‘김천 성전사’ 등이 있다. 이 모 외곡분원은 아니지만 모곡의 12연기법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는 ‘사단법인 상좌불교 한국명상원’등의 수행센터들이 있다. (김시연02(02), 15~16쪽.)
66) 페촐트(Hilartion Petzold)와 오르트(Ilse Orth)는 독일의 프리츠 페를스 연구소(Frzit Perls Institute: EAG-FPI)를 설립하였 다. 이들에 의해 개발된 된 통합문학치료는 2004년 한국에 수용되어 현재는 통합예술치료나 인문치료로 확장되고 있다. (김 경선(2016). 참고.)
67) 채연숙 외(2020), 27쪽.
68) 채연숙 외(2020), 152쪽.
69) 붓다고사(2015), 262쪽.
70) 김경선(2019), 32~33쪽.
71) 채연숙 외(2020), 140쪽, 149~150쪽.
72) 타말파 연구소는 예술가이자 움직임 교육자인 Anna Halprin(1925-)과 게슈탈트 심리치료자인 Daria Halprin(1945-) 모녀 가 소매틱 교육자, 건축가, 리더십 교육자 등과 모여 1978년에 설립되었다. (임용자(2014), 185~202쪽.)
73) Daria Halprin(2003), 서문.
74) Daria Halprin(2003), 3~4쪽.
75) 앤서니 스토(2018), 47쪽.
76) 류시화(2020), 163쪽.
77) 상윳따니까야 4(2018), 432쪽.
78) 이필원(2016), 376쪽.
79) Antonio Damasio(2015), 12쪽.
80) 앤서니 스토(2018), 45쪽.
81) 유발 하라리(2018), 138쪽, 467~ 4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