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eneutic understanding of breathing meditation in Mahāsatipaṭṭhāna Sutta

Research
인경(김형록) In-Kyung (Kim Hyung-Rok) 1*

Abstract

This paper aims to newly understand the meaning of breathing meditation through a systematic interpretation method of 'divided subjects' for the breathing section of 'Mahāsatipaṭṭhāna Sutta'. While examining the traditional interpretations of the upper left of the southern traditional part, it tried to grasp the structure and system of the early scriptures, focusing on the “breathing nodes” shown in Mahāsatipaṭṭhāna Sutta and Ānāpānassatisutta.

As a result, this paper categorizes the subjects of the entire breathing section into '4 stages of preliminary performance', '4 stages of main performance', 'parabolic explanation', and 'refrain phrase'. Preliminary performance is further divided into four stages: 'preparation', 'posture checking', 'reference point setting', and 'just knowing about breathing', and the subject of this performance is based on the traditional interpretations of the southern traditional parth. It was divided into four stages: ‘long breathing’, ‘short breathing’, 'training while experiencing the whole body', and 'training while calming the condition of the body'.

However, It is a dualization of the interpretation system that divides subjects and the performance system that is actually performed. when interpreting differently from the existing analysis, 'Long breathing' and 'Short breathing' are grouped together, and '~I'll breathing meditation' is separately categorized. In addition, the ‘parabolic explanation’ was not classified into subdivided coding categories, and the refrain was coded with ‘internal and external observing’, ‘observation of the birth and death of things’, ‘knowing and wisdom’, and ‘nirvana experience’.

Today, I recognize that there is a question of whether to follow the traditional interpretation faithfully or to creatively create a new system of breathing meditation. In addition to the question of the validity of the interpretation that occurs soon in the text comment, I feel that there is a need to readjust the transmitted breathing meditation to fit today's reality.

Keyword



Ⅰ 머리말

오늘날 붓다의 가르침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그 효과성을 검증하는 문제는 중요한 시대적 과업이다. 효과적인 현장연구를 위해서는 전승된 고대 문헌에 대한 연구는 연구가설이나 해석의 준거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필수적인 과정의 일부이다. 대부분 고대 문헌자료들이 당시의 언어로 기술되고 그때의 문화적 배경으로 기술된 관계로,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현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그렇긴 하지만 명상 붐과 더불어서 종종 문헌적 근거를 무시하는, 과도한 해석과 적용은 또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바로 전승된 경전 텍스트를 이해하는 해석학의 핵심갈등이 아닌가 한다. 대체로 오늘날 남방불교 문화전통은 전승된 과거의 문헌을 귀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북방의 대승불교 문화는 현장성을 중시하면서 주체적인 해석을 강조한다. 모든 연구자들은 역사 현장에서 문헌 텍스트를 두고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하는 주관적 경험과 더불어서, ‘그 해석의 객관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항상 부딪친다1). 문헌연구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현장연구는 경험적으로 효과성이나 타당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한다.

국내에서 호흡명상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로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기까지 독립적으로 연구한 사례는 학술지에 약 80편이 발표되고, 석박사 학위를 포함하면 104편 정도이다2). 결코 많은 분량은 아니다. 그나마 호흡명상과 관련하여 2010년 이후에는 박사학위가 6편 발표되고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들도 주제가 다양해지고 세분화되었지만, 대부분 문헌연구보다는 현실에 호흡명상을 적용한 효과성 연구가 76%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호흡명상과 관련하여 그동안 현장연구를 선호하였다3). 그러나 현장연구에 필요한 정밀한 이론적인 근거확보를 위해서, 문헌연구로서 경전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선택하였다. 연구의 주제는 대염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 Sutta)과 입출식념(入出息念經, Ānāpānassati Sutta)에 나타난 ‘호흡명상(Ānāpānasati)’을 중심으로 ‘과목 나누기’라는 체계적 해석방법을 통해서 해석학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호흡명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4). 대표적으로 대염처경의 경우는 호흡명상은 신념처(身念處)에서 호흡, 몸의 자세, 몸의 활동, 해부학적인 요소들, 4대 원소, 시체의 부패과정 등 6가지 가운데 하나로 설해지고 있다. 반면에 입출식념(入出息念經)에서는 전반부는 아라한과 같은 사과(四果)로 시작하여 후반부는 칠각지(七覺支)와 결합하여 설해지고 있지만, 호흡명상이 신수심법(身受心法)의 사념처(四念處)와 결합하여 총 16단계로 체계화시킨 부분이 특징적이다.

본고의 접근이 해석학적 문헌연구이기에, 현장연구는 일단 제외하고 남방불교 전통에서 중시하는 대염처경이나 입출식념에 나타난 호흡명상과 관련된 선행 문헌적 연구를 여기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경전에 나타난 호흡명상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기존 연구는 두 시기로 분류가 된다. 첫째는 2000년대로 남방의 전통적 해석을 국내에 소개하는 입장에서 대부분의 경전 해석을 남방 선지식의 견해를 존중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다. 두 번째는 2010년 이후의 동향이다. 남방의 전통적 해석과는 거리를 두면서 초기불교의 경전을 직접적으로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려는 연구경향이다5).

먼저 2002년 학술대회를 정리하여 출간한 홍원사편(2005), 대염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가 있다6). 이는 당시 위빠사나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면서 초기불교의 특정한 경전과 수행론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를 시작했다는 의미가 깊은 학술대회였다. 여기에는 4편의 논문이 게재되어 임승택의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의 이해’, 미산스님의 ‘대염처경의 주석서에 대한 이해’, 일중스님의 ‘고엔카 수행법과 대념처경’, 김재성의 ‘마하시수행법과 대념처경’이다. 발표가 끝나고 종합토론을 했는데, 여기서 다루어진 주된 이슈는 ‘parimukhaṃ의 의미’, ‘sati의 번역문제’, ‘고엔카와 마하시의 수행방법의 차이점’,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관계’, ‘삼매’와 같은 경전의 핵심주제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다루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역시 홍원사편(2005), 입출식념의 수행이론과 실제가 있다7). 여기에는 3편의 논문이 게재되어 있는데, 김재성의 ‘입출식경에 나타난 수행법’, 미산스님의 ‘입출식경 주석문헌의 이해’, 산티카로 법사의 ‘연기에 비추어 본 입출식경’ 등이다. 이때 다루어진 논의는 호흡명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는 ‘예비수행과 본수행의 문제’, ‘몸 전체(sabba·kāya)의 의미’, ‘입출식념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와의 관계’ 등이 있었다.

다음으로 2007년에 한국명상심리상담학회가 창간되어 간행된 명상심리상담(당시 명상치료) 창간호에서 호흡명상을 주제로 7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8). 여기서는 호흡명상의 현장연구와 관련된 논문이 4편이 있고, 본고와 방향과 관련된 문헌연구는 3편으로, 김홍미의 ‘잡아함경과 Samyutta-Nikaya에 나타난 입출식념의 유형’, 이필원의 ‘청정도론에 나타난 호흡 수행법’, 김성철의 ‘유가사지론<성문지>의 입출식념’ 등이 있다. 여기서 주로 다루어진 문제는 남방전통의 ‘호흡명상 16단계’ 설에 대한 이해와 그것이 설해지는 다양한 방식과 함께 ‘북방전통 6단계’ 호흡명상에로의 변용을 다루고 있다.

이후로 호흡명상과 관련된 문헌연구 중심의 집중적인 학술대회는 실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앞의 기존 연구 성과가 과도하게 남방 상좌부 전통적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진 점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문헌적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첫째는 정준영(2014)의 ‘호흡명상의 실천방법에 대한 재고: 초기불교와 상좌부불교의 입출식념을 중심으로’9)가 있다. 이 논문의 장점은 남방 상좌부의 전통적 해석을 존중하면서도, 초기불교의 입장을 구분하는 것이다. 남방 상좌부의 입장에 대한 선입견, 선이해에서 벗어나서,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호흡명상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해석학적 노력이다. 두 번째는 이필원(2016)의 ‘초기불교의 호흡 명상법에 대한 고찰-호흡명상의 다양한 위상을 중심으로10)’이다. 이 논문 역시 전통 남방 불교적 전통에 따른 해석보다는, 초기경전에 충실하여 호흡명상의 다양한 양상을 분류하여 포괄적으로 정리하여 준다는 점이 강점이다.

이상과 같이 본고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단순한 소개 수준을 벗어나서,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상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입장을 지지한다. 물론 본고는 남방 상좌부 전통적 해석 체계를 배제하지 않고 참고한다. 중요한 본고의 핵심된 관점은 전승된 고대 불교경전을 명상수행의 개별적 ‘주제어’에 대한 해석보다는 ‘문헌텍스트’라는 해석학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념처경에 나타난 호흡명상을 ‘어떻게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II. ‘호흡절’의 전체 과목나누기

해석학의 중요한 과제는 경전 텍스트의 의미를 주석하고, 그것의 전체적인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동안 경전의 내용을 주석하는 일은 논서(論書)를 중심으로 오랜 세월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수행의 해석학적 체계를 세우는 일에는 소홀해온 측면이 있다. 여기서 해석적 체계를 세운다는 의미는 경전에서 설한 내용을 ‘어떻게 분류하여 코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관점을 전통적인 해석학에서는 ‘과목(科目)나누기’라고 말한다11). 과목은 교육적인 커리큘럼을 분류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특정한 교재에 대한 의미단위로 내용을 분류하는 해석학의 기본적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테면 『대염처경』(DN22)의 전체 ‘과목 나누기’ 사례는 다음과 같다.

도입uddesa

I. 몸을 따라 관찰 Kāyānupassanā

A. 호흡 Ānāpāna Pabba

B. 행주좌와 자세 Iriyāpatha Pabba

C. 동작 Sampajāna Pabba

D. 해부학 Paṭikūlamanasikāra Pabba

E. 4대 Dhātumanasikāra Pabba

F. 시체 Navasivathika Pabba

II. 느낌을 따라 관찰 Vedanānupassanā

III. 마음을 따라 관찰 Cittānupassanā

IV. 법을 따라 관찰 Dhammānupassanā

A. 오장 Nīvaraṇa Pabba

B. 오온 Khandha Pabba

C. 육근 Āyatana Pabba

D. 칠각지 Bojjhaṅga Pabba

E. 사성제의 절 Sacca Pabba

E1. 고 Dukkhasacca Niddesa

E2. 집 Samudayasacca Niddesa

E3. 멸 Nirodhasacca Niddesa

E4. 도 Maggasacca Niddesa12)

위의 ‘과목’에서 ‘도입부(uddesa)’을 제외하고, 큰 범주로서 장(章)은 첫 번째 로마자로 표기한, I. Kāyānupassanā[身隨觀], II. Vedanānupassanā[受隨觀], III. Cittānupassanā[心隨觀], IV. Dhammānupassanā[法隨觀]이다. 과목은 이렇게 경전의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과목을 나누는 편집자의 관점이나 철학으로서 해석학적 안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두 번째로 중간범주로서 ‘절(節)’은 ABC 알파벳순서로 배열되었는데, 위의 ‘과목’에서 보듯이 몸을 따라서 관찰하는 ‘I. Kāyānupassanā[身隨觀]’에서 6개절로 분류를 하고, 다시 법을 따라 관찰하는 IV. Dhammānupassanā에서 5개절로 분류하고 있다. 세 번째는 하위범주로서 항(項)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된 중간범주로서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의미하는 E1. E2. E3. E4가 그것이다.

이런 분류체계는 전통적인 용어로는 ‘장절항목(章/節/項/目)’에 해당한다. 이것은 오늘날 논문을 작성할 때, Ⅰ→ 1 → 1) → (1)로 분류하여 작성하는 것과 유사하다. 위의 대염처경에서는 ‘Ⅰ. A, E1’ 3개로 구분하여 ‘과목표’를 만들었다. 이런 분류체계에 의하면, 본고의 주제 영역은 ’I. Kāyānupassanā(身隨觀)’ 제1장에서 호흡의 절인 ‘A. Ānāpāna Pabba’에 한정한다. 그런데 대염처경의 호흡절에 대한 세부적인 과목나누기는 구체적 논의는 아직은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남방 전통에서 전승된, 아래와 같은 Ānāpānassatisutta의 ‘호흡16단계’ 과목이 견고하게 고착되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이 아닌가 한다.

Ⅰ. 신념처(身念處)에서 호흡명상

1. 긴 들숨과 날숨 분명한 앎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2. 짧은 들숨과 날숨 분명한 앎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3.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4.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

assasissāmī'ti sikkhati.

Ⅱ. 수념처(受念處)에서 호흡명상

1. 기쁨을 느끼면서 훈련

'Pīti·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2. 행복감을 느끼면서 훈련

'Sukh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3. 마음의 조건을 경험하면서 훈련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4. 마음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Ⅲ. 심념처(心念處)에서 호흡명상

1. 마음을 경험하면서 훈련

'Citt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2.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훈련

'Abhippamod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3. 마음의 대상에 집중하면서 훈련

'Samādah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4. 마음에서 해탈하면서 훈련

'Vimoc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Ⅳ. 법념처(法念處)에서 호흡명상

1. 무상함을 따라 관찰하면서 훈련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2. 집착 없음을 관찰하면서 훈련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3. 소멸을 관찰하면서 훈련

'Nirodh·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4. 포기를 관찰하면서 훈련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위에서13) 신수심법의 4영역의 장(章)을 각각 4개의 절(節)로 구분하여 총 16개가 된다. 이런 과목의 배열은 전통적 해석학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 이것은 교육과 수행의 지침으로 활용되면서 처음 발심한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본고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런 남방 전통적 해석을 존중하면서도, 대염처경 신념처(身念處) 장(章)에서 ‘호흡의 절(A.Ānāpāna Pabba)’ 분류체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작성한다.

1)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1) 이 세상에서 비구는 숲으로 가고, 나무 아래로 가고, 텅 빈 장소로 가서 곧 앉는다. (2) 비구는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게 세운다. (3) 바로 (눈)앞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4) 그는 알아차림 하면서 다만 숨을 마시고 단지 알아차림 하면서 숨을 내쉰다14).

2) (1)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길게 들이마신다.’고 알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고 안다. (2) 짧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짧게 들이마신다.’고 알고, 짧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고 안다. (3) 비구는 몸 전체를 느끼면서, ‘(나는) 숨을 마시겠다.’라고 훈련한다. 그는 몸 전체를 느끼면서, ‘(나는) 숨을 내시겠다.’라고 훈련한다. (4) 몸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마시겠다.’라고 훈련한다. 몸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내시겠다.’라고 훈련한다15).

3)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그 제자가 길게 돌리면서, ‘나는 길게 돌린다.’고 알고, 짧게 돌리면서, ‘나는 짧게 돌린다.’고 아는 것처럼, 비구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숨을 길게 마신다.’고 안다. (위와 동일하게) 이와 같이 수행한다16).

4) (1)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는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리고 그는 안과 밖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2) 또한 그는 몸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리고 몸에서 발생과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3) 또한 (단지) "몸이 있다"고 하는 지금 이것의 알아차림이 그에게 현존한다. 그러는 한에서 오직 (온전한) 지혜가 있고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있다. (4) 그럼으로써 그는 의존하는 바 없이 머물고, 세상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무는 것이다17).

이상의 분류를 항목에 따른 제목을 붙여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예비수행 4단계

(1) 준비

(2) 자세 점검

(3) 기준점 설정

(4) 단지 호흡 알아차림 하기

2) 본수행 4단계(→ 수정안)

(1) 긴 호흡 앎 → 긴 호흡, 짧은 호흡 앎

(2) 짧은 호흡 앎 → 호흡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

(3)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 → 몸의 조건을 이완하면서 훈련

(4)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 → ~겠다 호흡명상

3) 비유적 설명

4) 후렴구, 명상수행 결과

(1) 안 밖의 무아 관찰

(2) 생멸의 무상 관찰

(3) 알아차림과 지혜

(4) 열반 체험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예비수행 4단계’과 ’본수행 4단계’이다. 이것은 본격적인 호흡수행을 ‘본수행’이라 하고, 본격적인 본수행을 준비하는 단계를 ‘예비적 수행’라는 의미로 호칭한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호흡명상에 한정해서 해석체계를 세우는 관점에서 선후를 구분하여 호칭한 것이다. 물론 호흡명상이 ‘예비적인 수행인가?’ 그 자체로 ‘본수행인가?’ 하는 논의가 있다18).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라 일반화할 수 없을 것 같다. 분명한 기준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 기준점은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해석체계’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입출식념경에서 설한 호흡명상이 그 자체로는 궁극의 열반에 이르지 못한 관계로 예비수행이거나 토대수행이라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호흡명상만으로도 궁극의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보는 입장에서는19), 호흡명상은 본수행인 것이다. 여기서 호흡명상을 예비수행과 본수행으로 구분하여 해석체계를 세우는 것은 예비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또한 기존에 ‘본수행’ 4단계만을 16단계로 포섭하고, 분류하지 않았던 준비적 예비수행 4단계를 설정하여 ‘『대염처경』에 나타난 호흡명상의 전체 과목’을 완성한다는 의미도 있다.

위에서 본수행에서 ‘과목나누기’는 일단 남방의 전통적인 해석과는 동일하게 코딩했다. 그러나 수행과목으로 체계를 세울 때는 다르게 분류하였다. 다시 말하면 남방전통의 해석체계에서는 제1단계 ‘긴 호흡의 앎’과 제2단계 ‘짧은 호흡의 앎’을 각각 분리하여 각각 한 과목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제1단계와 제2단계를 하나로 묶어서 수행하도록 하고,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을 두 번째로,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을 세 번째로 수행체계로 세운다. 대신에 네 번째는 ‘~겠다 호흡명상’을 별도로 독립시켜서 수행체계에 포함시켰다. 과목나누기에 의해서 해석한 것과 수행체계를 구분한 것이다. 이점은 ’Ⅳ, 본수행’에서 상론할 작정이다.

III. 예비수행 4단계

1. 준비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이 세상에서 비구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텅 빈 장소로 가서 곧 앉는다.(Katha·ñ·c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여기의 구절을 ‘준비단계’로 분류했다. 이유는 명상수행의 환경적 조건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쁜 일상의 환경으로부터의 ‘떠남’이다. 숲으로 가고, 나무 아래로 가고, 텅 빈 장소로 간다. 적어도 위의 구절만 보면 새로운 컴퓨터에서 데이터를 운용할 때 사용하는 것처럼, 명상수행을 위한 환경 설정처럼 보인다. 수행자가 숲, 나무 아래, 텅 빈 장소 등으로 옮겨감은 분명하게 ‘장소의 이동’이다. 오늘날 집에서 명상을 한다면 문을 걸고 핸드폰을 꺼놓고 외부와의 접촉을 잠정적으로 차단하는 것과 같다. 명상수행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서 방해를 받지 않겠다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일상의 세속으로부터의 ‘떠남’에 대한 강조는 초기경전에 해당하는 숫타니파타에서 매우 다양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자가 소리에 놀라지 않음과 같이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음과 같이

연꽃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음과 같이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처럼20).

초기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떠남[厭離]’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위의 인용문은 ‘떠남’이 단순하게 ‘환경설정’이 아닌 ‘번뇌의 소멸’을 뜻하는 철학적이고 수행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하게 장소의 이동으로서의 ‘떠남’이 아니고, ’소리’, ‘그물’, ‘흙탕물’과 같은 ‘번뇌’로부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떠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의 떠남을 세속으로부터 떠나는 장소이동의 출가주의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21). 초기불교를 출가중심이라고 하면서, 대승불교는 이 세상을 떠남이 없이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이런 관점도 이해는 되지만, 대염처경에서는 이런 관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의 길(ekayana)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것은 우울과 분노를 이겨내고, 깊은 고통과 불만족을 소멸시킨다. 이것은 진리의 길을 걷게 하고, 궁극의 해탈, 열반을 실현하게 한다. 이것은 바로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이름하여 사념처(四念處)의 길이다22).

이것은 경이 설해진 취지를 설하는 도입부(uddesa)의 일부이다. 여기서 보듯이 대염처경에는 장소의 이동을 강조할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의 정화,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강조하고, 이것을 위해서 ‘숲’으로 가고, ‘나무 아래’로 가고, ‘텅 빈 장소’로 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번거롭고 복잡한 도시의 거리보다는 훨씬 집중력과 깊은 내적인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한 점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2. 자세점검

그는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게 세운다(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ahati).

이것은 앉아서 명상수행을 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할지를 언급한 부분이다. 이것을 필자는 ‘자세점검’이라고 코딩한다. 경전에서는 단순하게 가부좌와 허리를 곧게 세운다는 두 가지만을 언급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더욱 자세한 자세를 제시한다.

예를 들면 필자는 ‘머리를 배곱선에 일치시키고 어깨는 귀볼과 지면을 수평이 되게 하라’고 코칭한다. 뿐만 아니라 다리도 가부좌가 잘 되지 않는 대부분의 대중들에게 반가부좌를 권하고, 손의 위치도 전통적인 정법계인을 취하지 않고 융통성을 허용하여 다양한 방식을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자세점검’이란 용어가 암시를 하듯이, 자세를 취한 다음에 스스로 알아차림을 가지고 점검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앉아서 명상을 하면 편안한 까닭에 어느 순간에 졸거나 아니면 딴 생각에 빠지면서 자세가 흩뜨려진다. 이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자세를 하나씩 알아차림 하여 점검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세를 점검하고 자각하는 자체가 수행의 일부가 된다. 마치 처음부터 다시 명상수행을 시작하는 듯 스스로를 점검하면서 자세를 다시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 기준점 설정

바로 (눈)앞에 알아차림을 확립하고서(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여기서 핵심된 용어는 면전(面前)으로 번역되는 ‘parimukhaṃ’이다. 이후 주석자들은 면전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하였다. 면전의 의미는 호흡명상을 할 때 주의집중이나 관찰의 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것은 명상을 지도하는 지도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 이것에 대한 국내에서의 첫 번째 논의는 2002년 10월 19일 홍원사 주최로 토론에서 이루어졌다23). 여기서 대표적으로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보자. 고엔카(S.N.Goenka, 1924-2013)는 콧구멍과 가까운 인중을 면전으로 본다24). 눈으로 가깝기에 집중을 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본다. Maha Boowa는 호흡에 대해서 처음에는 코에 집중하지만 나중에는 가슴으로 이동하라고 말한다25). 반면에 마하시(Mahasi sayadaw, 1904년~1982년) 센터에서는 복부, 곧 아랫배를 면전으로 본다26). 왜냐면 아랫배는 아래쪽에 있고, 넓은 영역을 차지하기에 관찰에 쉽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호흡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관찰한다고 할 때, 그 관찰대상을 분명하게 지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장애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parimukhaṃ’, 면전을 별칭으로 ‘기준점 설정’이라고 호칭한다. 왜냐면 호흡명상을 수련할 때나 걷기명상을 할 때, 관찰의 기준점을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설정을 해주어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호흡명상을 수행할 때 실제 상황에서 우리가 기준점을 설정하려고 할 때 코끝이나 가슴, 그리고 아랫배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들은 마음으로 ‘표상하여’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은 엄밀하게 말하면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공기의 흐름이다. 이 과정은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실제로 관찰 가능한 것은 몸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표상일 뿐이다. 여기 사용한 ’표상’이란 ‘nimitta’의 번역어다. 사전적인 의미는 아래와 같다27).

-mark, sign; image; target, object

-As signifying the mental reflex-image occurring in meditation

호흡명상의 경우에 표상이란 집중의 ‘징표’이고, ‘대상’, ‘이미지’, ‘타깃’이다. 명상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정신적인 반영-이미지인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상상하여 만들어낸 대상이라고 잘못된 오해가 있다. 호흡명상에서 나타나는 표상이란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몸의 감각, 횡격막의 움직임에 의해서 생성된 ‘감각 이미지28)’를 말한다. 결코 호흡에 집중을 할 때, 호흡과 별개의 이미지는 아니다. 호흡표상은 수행을 할 때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못하게 보호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호흡표상이 나타남은 곧 그만큼 집중이 깊어짐을 의미하기에, 삼매로 들어가는 징표로서 삼는다.

초심자를 위해서는 호흡명상을 시작할 때는 인중, 가슴, 아랫배 등 순차적으로 시험을 해보고 자신에게 알맞은 기준점을 설정하여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필자가 현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10명중 7명 정도가 아랫배에 기준점을 두는 경우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인중에 기준점을 두는 경우이고, 마지막은 처음 호흡명상을 시작하는 이들은 가슴인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면전(面前, parimukhaṃ)이란29) 정해진 신체적 지점이 아니라 수행자가 마음에 의해서 집중하는 ‘대상표상’이 바로 면전이고 기준점이 된다. 눈을 감고 호흡대상에 집중할 때 인중에 주의를 둔 사람은 바로 인중이 면전이고, 가슴에 둔 사람에게는 가슴이 면전이 되고, 아랫배에 기준점을 둔 사람은 바로 아랫배가 면전이 되는 것이다. 또한 걷기 명상을 할 때는 걷는 다리의 움직임이 면전이 된다. 염불명상처럼 듣기가 중요할 때는 듣는 소리가 관찰의 기준점, 면전이 된다. 이점은 반드시 명상수행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마찬가지이다. 요리를 할 때 칼로 배추를 자를 경우도 그렇고, 청소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렇게 되면 일상의 행위가 모두 명상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눈앞에 나타난 대상표상으로서 면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준점이 무엇이든지 표상된 대상에 대한 sati, 곧 알아차림과 집중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바로 눈앞에 나타난 표상, 관찰의 기준점에서 알아차림을 얼마나 견고하게 확립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4. 단지 호흡 알아차림 하기

그는 알아차림 하면서 오직 숨을 들이마시고, 알아차림 하면서 단지 숨을 내쉰다.(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위의 구절을 예비수행으로 할지, 아니면 다음의 본수행에 포함시킬지는 고민이 되는데, 다음 장의 본수행이 4단계로 분류하였기에 예비수행으로 배치하였다. 이렇게 되면 예비수행도 4단계로 균등하게 나눌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위의 핵심은 날숨과 들숨에 대한 sati가 핵심이다. ‘그는 알아차림 하면서 오직 숨을 들이 마시고(so sato va assasati), 알아차림 하면서 단지 숨을 내쉰다(sato va passasati).’고 할 때, 이것은 정확하게 ‘sati’ 수행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사용된 ‘va(=eva)’는 강조사(emphatic particle)로서 ‘오직(only)’, ‘다만(just)’란 의미이다. 숨이 들어오면 ‘오직’ 숨이 들어옴이 있을 뿐이고, 숨이 나가면 ‘다만’ 숨이 나갈 뿐이다. 이곳에 다른 불순물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런 점에서 ‘sati’는 들숨과 날숨에 대한 어떠한 판단이나 분별이 없는 ‘단지 집중된 자각’일 뿐이다. 이곳에는 오직 호흡‘만’이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sati를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을 반대한다. sati 자체가 마음현상인데, 번역어에 다시 원문에 없는 마음을 첨가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이층집을 만든 까닭이다. 그래서 호흡은 기본적으로 몸의 영역에 속한데,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게 되면, 호흡에 대한 어떤 마음이 존재하고, 그 마음을 챙기라는 의미가 되어서, 대상이 ‘호흡’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는 범주의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호흡에 대한 다른 불순물이 끼어들면서 주의집중이나 호흡에 대한 자각을 방해하는 것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sati는 오직 ‘순수한 알아차림’이고, 흔들림 없는 ‘지속적인 주의집중’이다.

그런데 이런 순순한 집중은 찰나의 순간이고 다시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게 된다. 이런 생각들이 끼어들면 곧 그 생각을 ‘자각’하고, 다시 호흡 그 자체로 돌아오면 된다. 이것이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과 집중이다. 알아차림은 집중을 가능하게 하고, 강화된 집중은 더욱 강력한 알아차림을 유지시킨다.

IV. 본수행 4단계

Ⅴ. 후렴구-명상의 결과로서 열반체험

앞에서 과목을 나눈 바처럼 호흡명상의 본수행에서 코딩은 남방의 전통적인 해석과 동일하게 분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하는 수행체계는 다르게 과목을 나누었다. ‘긴 호흡의 앎’과 ‘짧은 호흡의 앎’을 하나로 묶었고, 두 번째를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 세 번째는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으로 하고 네 번째는 ‘~겠다 호흡명상’을 별도로 독립시켜서 구별하였다. 다시 말하면 과목을 나누는 해석체계와 실제로 수행하는 수행체계를 서로 분리하여 이원화시킨 것이다.

1. 긴 호흡과 짧은 호흡

또한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고 알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고 안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짧게 들이마신다.’고 알고, 짧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고 안다.(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첫 번째 이슈는 남방불교 전통 과목에서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을 구분한 점이다. 물론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의 구분은 분명하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날숨이 길다고 말하고, 반대로 들숨이 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 날숨과 들숨은 신체적인 상태에 따라서 달라진다. 또한 의도적으로 날숨을 길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들숨을 길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을 구분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들숨과 날숨의 길고 짧음은 정확하게 길이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만큼이 길다는 것이고, 어느 만큼이 짧다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물론 대부분 의도적으로 관찰을 했을 때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일정치 않고 그때그때 변한다. 이럴 때마다 ‘들숨이 길다. 날숨이 짧다.’고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때문에 들숨이 긴지, 아니면 짧은지를 계속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현장에서 양자의 구분이 어렵고 오히려 깊은 집중, 선정에 방해가 된다는 의견을 듣곤 한다. 반대로 길고 짧음의 ‘호흡 길이’보다 거친지, 안정적인지 하는 ‘호흡상태’에 대한 인식이 훨씬 선명하다고 보고한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을 한 묶음으로 과목나누기를 하였다. 물론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을 구분하는 전통적 코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의 과목으로써는 분리하지 않고 양자를 하나로 묶어서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쟁점은 sati와 saṁpajāna의 차이점이다. 호흡명상의 예비수행과 본수행의 차이점은 sati와 saṁpajāna의 차이점에서 결정 난다. sati는 예비수행에서 기술되고, saṁpajāna는 본수행에서 강조된다. 예비수행 4번째에서 “그는 들숨과 날숨을 오직 알아차림 하면서 숨을 들어 마시고, 알아차림 하면서 단지 숨을 내쉰다(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는 구절에서 보듯이, 예비수행에서는 ‘sati’만을 말한다. 그러나 본수행에서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라고 안다(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 ti pajānāti).”로 기술한다.

이점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길게 들이마신다.’라고 안다."는 문장에서 ‘assasanto’는 현재분사이기에,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로 번역한다. 이것은 일차적 sati에 속한다. 다음 문장은 "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라고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이차적으로 드러난 ‘pajānāti>saṁpajāna’이다. 또한 여기서 무엇보다도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나는 ~라고(~iti) 안다’는 문장은 분명하게 언어적인 판단이 개입된 상태이다. ‘들숨’과 ‘날숨’, ‘길다’와 ‘짧다’는 구분은 분명하게 모두 언어적 판단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비판단의 알아차림, sati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한 앎’이나 ‘바른 이해’로 번역되는 ‘saṁpajāna’이다. ‘sati’가 비언어적인 지각이고 일차적인 알아차림이면, ‘saṁpajāna’는 sati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이차적인 분별, 앎의 영역에 속한다.

셋째, ‘saṁpajāna’는 saṁ+pajāna로서 ‘saṁ’은 ‘정확한’, ‘전체에’, ‘균형을 가지고’ 라는 접두어이고30, ‘pajañā’는 지혜를 의미하는 'paññā'와 같은 어근으로서 대상의 보편적 특성을 이해하는 통찰을 의미한다. sati가 순간순간 변화되는 개별 사물을 포착하는 것이라면, sampajāna는 짧음이나 긴 호흡과 같은 사물의 전체에 관여된, 혹은 무상과 같은 보편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고통, 무상과 같은 사물의 특성에 대한 인식은 개별사물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것은 개별적 사물에 대한 ‘알아차림’보다는 사물의 전체를 직관하는 ‘분명한 앎’의 대상이 된다. 일부 기존의 번역에서 sampajāna를 단순하게 ‘알아차림’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sampajāna’라는 용어가 함축하는 보편적 ‘특성’에 대한 통찰이나 공성(空性)의 지혜라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면, 저기에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지각은 sati, ‘알아차림'이다. 그러나 확인하기 위해서 그곳에 다가가서 ‘이것은 장미꽃이다.’고 아는 것, 짧은 호흡과 긴 호흡을 아는 것, 들숨과 날숨을 구분하는 것은 sati를 기반한 sampajāna로서 ‘분명한 앎’의 영역에 속한다. 호흡명상에서 sati, 알아차림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하듯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보편적인 특성에 대한 ‘앎’은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고유한 인간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넷째로 sati, ‘알아차림’과 비교하여 보면, 분명한 앎의 sampajāna는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알아차림이 일차적이라면, 삼빠잔나는 대상에 대한 이차적인 ‘분명한 앎’이다. 그래서 위의 염처경에서는 sati를 먼저 ‘단지 숨을 내쉰다(p).’고 설하고, 나중에 이차적으로 ‘나는 숨을 내쉰다(p).’고 안다(K)."고 설한다. 기호로 표시하면 sati가 포함된 문장을 ‘p’라고 하면, sampajāna가 포함된 문장은 K(p)가 된다. ‘p’가 일차적 대상인식이라면, 그것을 아는(knowing, 知) 상위의 자각, ‘K(p)’이다. ‘p’와 ‘K(p)’, 양자는 서로 동일한 내용이 아니다. ​명상수행이란 현재의 경험에 대한 반복적인 ‘알아차림’이 있고, 그런 다음에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상위자각으로서 ‘분명한 앎’, 통찰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상을 정리하여 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http://dam.zipot.com:8080/sites/mpca/images/mpca_23_01_image/Table_mpca_23_01_T1.png

다섯 번째는 sati와 sampajāna의 선후관계이다. 대부분 초기경전에서는 먼저 ‘알아차림(正念)’을 말하고, 다음에 ‘분명한 앎(正知)’의 순서로 교설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정념정지(正念正智)가 쌍으로 함께 사용한 용례가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35회, 중아함경에서는 28번이 발견된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의 시점이며, 직접적인 경험을 의미한다. 반면에 분명한 앎은 사물의 보편적, 그 전체적인 특성에 대한 통찰을 말한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내적인 변화[몸, 느낌, 마음, 담마]에 대한 ‘알아차림’은 그것들에 대한 ‘분명한 앎’을 가능하게 하고, 이런 ‘바른 앎’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들에 대한 ‘본질’을 통찰하게 된다.

반대로 일단 사물의 보편성에 관한 ‘분명한 앎’이 성취된다면, 개별적인 ‘알아차림’은 좀 더 빠르게 가져올 수 있다. 이때는 먼저 sampajāna이 선행되고, 나중에 sati로서 확인된다. 이렇게 정지정념(正智正念)으로 사용된 경우는 『잡아함경』에서 17번이 나온다. 다른 아함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남방의 Nikāya에서는 ‘sato (ca) sampajāno’라는 언구가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언급되고, Saṃyuttanikāya에서만 30회 정도가 발견된다. 반면에 ‘sati’보다 ‘sampajāna’가 먼저 나타날 경우는 『대념처경』처럼, 대부분 ‘ātāpī sampajāno satimā’가 한 짝을 이루면서 사용한 경우에 한정된다. 이것은 선정념(先正念) 후정지(後正智)가 애초의 의미이고 나중에 정지(定智)→정념(正念)의 순서가 개발된 것이 아닌가 한다.

2. 몸 전체를 느끼면서

비구는 몸 전체를 느끼면서, ‘(나는) 숨을 마시겠다.’라고 훈련한다. 그는 몸 전체를 느끼면서, ‘(나는) 숨을 내시겠다.’라고 훈련한다('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 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 ti sikkhati).

위에서 쟁점은 ‘몸 전체를 느끼면서(sabba-kaya-paṭisaṃvedī)’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다양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몸 전체를 느끼면서’는 의미는 뭘까? 이미 호흡에 집중하고 있는데, 다시 온몸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런 점들이 질문이 된다. 이점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다31). 먼저 Buddhaghosa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 Magga에서 보면, ‘온 전체’란 날숨이든지 들숨이든지, 호흡하는 그 전체(whole)로서 호흡의 ‘처음, 중간, 끝’을 말한다32). 이 경우는 무애해도(無礙解道)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33. 왜냐면 이것은 과목의 분류에서 맥락이 호흡의 과정을 설하는 대목[節]이기에, ‘몸 전체’란 바로 날숨이든지 들숨이든지 ‘호흡 전체’를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또 다른 해석은 Buddhadasa의 경우로, ‘들숨과 날숨’의 낱개 모두(all)를 말한다34). 날숨이나 들숨의 개별적인 분리된 특징이 아니고, 호흡의 양쪽 모두를 함께 가리킨다. 이 경우도 유용한 해석이다. 우리가 호흡을 관찰한다는 말은 결국 양쪽 모두를 관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해석은 실제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초점을 가진다. 전자의 처음-중간-끝은 날숨이든지 들숨이든지 호흡의 길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후자는 호흡의 길이보다는 길든지 짧던지 들숨과 날숨 모두를 관찰하는 것이다. 전자는 분석적인 관찰이라면 후자는 직관적 관찰이다. 날숨과 들숨을 구분하는 것도, 그렇고 처음, 중감, 끝을 구분하는 것도 분석적인 접근이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를 구분하지 말고, 전체를 하나로 통으로 관찰하는 것은 확실하게 직관적이고, 유용한 방식이다.

한편으론 북전에 해당되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몸 전체를 느끼면서[覺遍身]’를 호흡뿐만 아니라, 몸의 땀구멍[身毛孔]을 포함한 글자 그대로 ‘몸 전체’로 해석한다35). 왜냐면 호흡명상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때는 코 구멍을 따라서 숨을 관찰하지만, 호흡명상[息念]이 성숙했을 때는 몸 전체 땀구멍에서 이루어지는 숨까지 관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점은 땀구멍이 숨을 쉬는지, 연구대상이다. 오늘날 ‘뇌호흡’36)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처럼, 경험적인 증거가 필요한 시점이다.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한다. 몸 전체란, 어떤 해석이 더 합당한가? 해석의 정당성은 결국 이 경우는 주관적이긴 하지만 경험적 근거에 의존하여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수행의 깊어지면서 처음에는 호흡의 길이에 주목하다가, 점차로 선정이 깊어지면 들숨과 날숨 양쪽 모두를, 마지막에는 온 몸 전체로 호흡하는 방식으로 확대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3.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몸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마시겠다.’라고 훈련한다. 몸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내시겠다.’라고 훈련한다('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 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 ti sikkhati).

여기서는 주요논점은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라는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핵심은 ‘kāya-saṅkhāraṃ’이란 낱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불교에서 ‘saṅkhāra’란 용어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번역으로는 ‘의지적 행위’, ‘조건’, ‘형성됨’, ‘습관적 반응’ 등을 의미한다37).

한역에서는 saṅkhāra를 번역하는데 있어, 대표적으로는 오온(五蘊)에서 의지적 노력(volitional effort)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 조건 지어진 일체 현상을 가리키는 삼법인에서 사용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ṅkhāra aniccā), 습관(業)의 형성(kamma-formation)이란 의미로 해석되는 12연기에서 무명(無明)/행(行)/식(識)에서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면 정확하게 ‘kāya-saṅkhāra’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 이것에 대해서 필자는 ‘몸의 조건’, ‘몸의 의지’, ‘몸의 형성’을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호흡을 가리키는 말이다.

Buddhaghosa의 청정도론(淸淨道論)을 보면, ‘거친 호흡을 조용히 해서 하라’고 말한다. 여기에 따르면, ‘kāya-saṅkhāra’는 바로 호흡의 기능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몸과 마음이 거칠어서 조용하지 못하면 입으로 호흡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조용해지면 호흡도 부드러워지고 섬세해진다. 비유하자면 짐꾼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입으로 거칠게 호흡하다가, 짐을 내려놓고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면 호흡이 고요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38). 이런 해석은 Buddhadasa의 경우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kāya-saṅkhāra’는 ‘몸의 조건’으로 해석하는데, 몸이 유지되는 조건은 바로 ‘호흡’이라는 것이고, 호흡이 멈추면 몸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39). 때문에 거친 호흡을 고요하게 하면서 명상을 하라고 한 점에서 청정도론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이런 해석은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도 발견된다.

몸의 행위를 멈춘다는 것은 호흡이 점점 미세하여져서 마침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응당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림 하는 호흡명상은 전체적 접근[總]이고, 짧은 호흡, 긴 호흡하는 것은 개별적 접근[別]이다. 다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림만 하는 호흡명상’은 욕계에서의 호흡을 유지함이요, ‘짧은 호흡을 알아차림 하는’ 명상은 초선이고, ‘긴 호흡을 알아차림 하는’ 명상은 2선이고, ‘몸 전체를 느끼면서 하는’ 호흡명상은 3선이고,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하는 호흡명상은 4선이다40.

여기 대비파사론에서도 ‘kāya-saṅkhāra’, 몸의 행위, 몸의 조건을 마찬가지로 ‘호흡’으로 보고 있다41. 특히 호흡에 대해서 들숨과 날숨은 전체[總]이고, 호흡의 길고 짧음은 개별적[別] 접근이라는 해석이 인상 깊다. 이것은 곧 점차적으로 호흡이 미세하여 지고 깊어지는 과정을 설명하여 준다.

또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 정리하여 주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날숨과 들숨을 전체적으로 알아차림, sati하는 호흡명상 ‘예비수행 4단계’는 욕계(欲界)에서 이루어진다. 아직은 세간의 욕계를 떠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각각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호흡명상 ‘본수행 4단계’는 색계(色界)의 4선정에 해당된다고 해석을 한다. 곧 짧은 호흡 상태는 초선(初禪)이고, 긴 호흡 상태는 이선(二禪)이고, ‘몸 전체를 느끼면서’ 하는 호흡명상은 삼선(三禪)이고,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하는 호흡명상은 사선(四禪)이다.

그런데 호흡명상 본수행 4단계에서 대염처경은 제1단계 긴 호흡이 먼저이고 제2단계 짧은 호흡이 나중에 기술된다. 그러나 대비바사론은 제1단계 짧은 호흡이 먼저이고, 제2단계 긴 호흡이 나중으로 되어 있다. 물론 필자는 긴 호흡과 짧은 호흡에 대해서, 그리고 그 순서에 대해서도 대비바사론처럼 초선과 이선이라는 수행론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았다. 과연 이런 해석은 정당한 해석인가 질문이 생겨난다. 어느 쪽이든지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있으면 되었지, 양자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초선(初禪)이고, 이선(二禪)이 된다. 만약에 어떤 의도가 있는 ‘거친’ 호흡을 욕계라 하고, ‘짧은’ 호흡을 아직도 산란이 남아있는 초선이라고 하고, ‘긴’ 호흡을 산란함이 사라진 내적인 침묵이고 이것을 이선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짧은 호흡과 긴 호흡이 선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은밀한, 아니면 상징적인 ’기호’라고 한다면, 충분하게 이해가 된다. 왜나면 짧은 호흡은 속도가 빠른 것이고, 그래서 거칠다는 의미라면, 그리고 긴 호흡은 속도가 느려진 좀 더 깊은 선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이해는 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온 몸을 느끼면서’를 삼선(三禪)에서 드러나는 ‘충분한 알아차림’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를 모든 감정들이 가라앉아서 끝내는 정화하는, 본래의 청정성이 드러나는 것을 상징한다면, 그렇다면 과도하게 확대된 해석이지만, 사선(四禪)으로 이해가 될 수 있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호흡명상이란, 호흡을 주제로 하는 명상수행인데, 호흡명상 수행만으로도 예비수행을 거쳐서 본수행에 이르러 청정성의 사선(四禪)까지 충분하게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을 한다면, 필자 역시 충분조건으로 공감하고 동의를 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충분한 경험적인 증거에 의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단서를 두고 싶다. 이를테면 청정도론에서 비유적이지만,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를 바쁜 일을 해서 거칠어진 호흡이 가라앉게 되는 상태를 곧장 ‘사선(四禪)에 들어감’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곧 사선(四禪)의 징후인 ‘내적인 깊은 평화’와 ‘청정성의 드러남’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비바사론이나 이후의 청정도론의 해석은 조금 우려가 되는, 무리한 해석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상으로 보면 ‘kāya-saṅkhāra’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곧 ‘호흡’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호흡을 포함하여 ‘몸 전체의 현상’으로 확대하여 이해하고 싶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kāya-saṅkhāra’를 호흡으로 본다면, 결국은 ‘호흡을 가라앉히면서, 호흡을 훈련한다.’는 말이 되어서 중복된다. 물론 호흡이 점차로 가라앉아서 고요해진다는 의미로 충분하게 이해는 된다.

그렇긴 하지만 필자는 좀 더 현대적인 관점에서 ‘kāya-saṅkhāra’를 의미 그대로 해석하여, ‘몸 전체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라는 말은 곧 호흡뿐만 아니라, 몸의 긴장이나 몸의 열기와 같은 ‘몸의 다양한 현상을 이완하면서’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것은 ‘호흡’을 가리킨다는 전통적인 해석을 ‘몸의 긴장이나 몸의 열기와 같은’ 다양한 요소를 ‘가라앉힌다.’는 것으로 확장시키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각 단계별 중첩을 피할 수가 있다.

4. ~겠다 호흡명상

이상으로 본수행에서 2단계 ‘호흡 전체를 느끼면서 훈련’ 하는 호흡명상이나 3단계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 하는 호흡명상은 모두 다 ‘숨을 들이마시겠다.’거나 아니면 ‘숨을 내쉬겠다고’고 하면서 연습한다고 할 때, 필자는 이것을 ‘~겠다 호흡명상’이라고 독립적으로 호칭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것은 ‘숨을 마시겠다(마실 것이다.)고(assasissāmī'ti)’ 하는 것과, 또는 ‘숨을 내쉬겠다(내쉴 것이다)고(passasissāmī'ti)’ 하는 술어가 모두 ‘~을 하겠다.’는 미래형(-issa)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흡대상을 인식하는 관점에서 볼 때, 왜 현재형이 아닌, 미래형을 사용한 것일까?

‘전체 몸을 느끼면서(sabba-kāya-paṭisaṃvedī)’와 제3단계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passambhayaṃ kāya saṅkhāraṃ)’가 모두 대상이 호흡이고, 현재형이다. 현재 자각의 대상은 몸 전제를 ‘느끼고’,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과 동일한 시점에서 ‘숨을 들이마시겠다.’거나, ‘숨을 내쉬겠다.’는 새로운 행위를 같은 시간에 동시에 진행할 수 있을까?

불교의 대상인식론에서 의식은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이라 하나의 대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 시간의 축으로 보면 먼저 A; ‘느끼면서’거나 ‘가라앉히면서’가 선행하고, 그런 다음에 찰나의 순간이지만, B; ‘앞으로 숨을 마시겠다.’고 하면서, C; ‘숨을 마시는’ 행위가 함께 뒤따른다. A와 B, 그리고 C는 서로 다른 시간에 발생했다가 소멸되는 현상이다. 다시 적어보면, ‘A; 몸 전체를 느끼면서, B; 의도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겠다고 하면서, C; 숨을 들이마신다고 훈련한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실제로 이것을 연습해보면, 확실하게 집중력이 배가된다. 그 이유는 ‘A, B, C’ 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찰나 찰나를 놓치지 않고 집중한 까닭이다. 여기서 A는 ‘알아차림’이고, B는 ‘~겠다’이고, C는 ‘분명한 앎’이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과 연결되는 ‘분명한 앎’의 조건은 ‘~겠다’이다. ‘~겠다’는 자동 조정되는 무의식이 아니라, 분명하게 의식적 작의(作意)이다. ‘~겠다’를 통해서 ‘분명한 앎(sampajāna)’이 발생하고, 계속적으로 ‘훈련’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겠다’ 호흡명상을 강조하고 독립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 별도로 구분하여 호칭한다.

두 번째는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예비수행 4번째 단계가 들과 날숨에 대한 ‘sati’이고, 본수행의 제1단계, ‘긴 호흡’, ‘짧은 호흡’이 모두 ‘sampajāna’이다. 그러나 제2단계 ‘몸 전체’와 제3단계 ‘몸의 조건’은 ‘~겠다’라는 훈련(assasissāmī'ti sikkhati)을 기술한다. 곧 ‘알아차림(sati)’ → ‘분명한 앎(sampajāna)’ → ‘~겠다고 하는 훈련(sikkhati)’의 순서로 점차로 깊게, 확장되어 호흡명상 수행이 진행된다.

특히 이후에 이루어지는 ‘느낌[受]’, ‘마음[心]’, ‘담마[法]’를 관찰할 때, 대염처경에서는 ‘분명한 앎(sampajāna)’이 중심이지만, 입출식념경에서는 ‘~겠다고 하는 훈련(sikkhati)‘이 중심이다. 이게 양자의 차이점이다. ‘분명한 앎’과 ‘~겠다 호흡명상’은 단순하게 ‘몸[身]’ 영역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후에 이루어지는 ‘느낌[受]’, ‘마음[心]’, ‘담마[法]’를 관찰할 때도 계속적으로 적용되어 사용한다는 점이다. 입출식념경에서 호흡명상의 16단계 가운데 14번을 ‘~겠다 호흡명상’을 사용한다. 반면에 대념처경에서는 ‘분명한 앎(sampajāna)’가 그 위치를 차지한다. 양자는 각각 전체의 88%를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세 번째는 현실에 적용의 문제로서, ‘~겠다’ 호흡명상은 처음에는 호흡명상에서 시작하지만,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호흡명상 뿐만 아니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상의 다른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예를 들면 갈 때는 ‘가겠다’고 하면서 가고, 올 때는 ‘오겠다’고 하면서 온다. 컵을 집을 때는 컵을 ‘집겠다’고 먼저 알아차림을 하고 컵을 집는다. 그러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 능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분명한 앎’을 통해서 강력한 집중력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유용한 명상전략이다.

네 번째는 ‘~겠다 호흡명상’의 상담이나 심리 치료적 활용이다. 대염처경의 핵심은 sati에 기반한 sampajāna가 중요하다면, 입출식념경에서는 sampajāna에 근거한 ‘~하겠다는 훈련’이 중심을 차지한다. 예를 들면 대염처경에서는, 분노의 마음이 있으면 그 자체로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고, 분노가 없으면 없다고 ‘아는’ 것이 중요한 수행의 과정이다. 그러나 뭔가가 부족하다. 이것을 보완하여 주는 것이 입출식념경의 심념처(心念處)이다. 예를 들면 여기에서는 분노의 마음을 호흡과 함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관점인데, 일상에서 A; 분노의 마음을 느낄 때(citta·paṭisaṃvedī)’ B; 숨을 들이마시겠다고 하면서(assasissāmī'ti), C; 숨을 들이마신다(sikkhati)고 하자. 여기서 분노가 아주 강하다면 어떨까? 고객이나 수행자는 분노의 마음에 휩쓸려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숨을 ‘들이 마시겠다’고 의지를 낸다면, 그러면서 호흡과 함께 분노를 경험하면서, 분노의 마음을 관찰할 수가 있다면 어떨까? 이렇게 ‘~겠다 호흡’이 분노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호흡에 중심을 두면서 계속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 만약에 이렇게 사용한다면, ‘~겠다 호흡명상’은 명상훈련뿐만 아니라, 심리상담이나 심리치료의 현장에서 감정을 조절하거나 고통을 감내하는 기술로서도 효과적으로 응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통적 해석을 따라 정리하면, 제1단계를 긴 호흡, 제2단계가 짧은 호흡, 제3단계 ‘몸 전체를 느끼면서’, 제4단계가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이다. 모두 호흡을 대상으로 한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서로 중첩될 가능성이 있다. 제1단계와 제2단계는 분명하지만, 길이가 실제로 들숨이니 날숨인지, 아니면 각각 다른지가 애매하다. 필자는 대체로 ‘날숨은 길고 들숨은 짧다.’는 반응을 현장에서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양자를 과목을 분리하지 말고 한 과목으로 묶었다. 제3단계에서 몸 전체를 호흡으로 볼 때 이 경우도 애매하다. 호흡의 처음, 중간 끝이라곤 한다면 결국 길이를 말하고, 이것은 분명하게 앞 단계와 겹치게 된다. 그러나 들숨과 날숨의 전체[總, all]로 해석하면 겹침을 피할 수가 있다. 마지막 제4단계는 호흡을 가라앉힌다는 말은 거침과 빠름과 관련된 호흡 상태를 말한다면 앞 단계와 겹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3단계까지 오면 대체로 호흡은 고요한 상태가 되기에, 여기서는 호흡뿐만 아니라 몸의 긴장이나 열기와 같은 전체적인 조건을 포함하여 ‘몸의 조건을 이완하면서’란 의미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겠다 호흡’을 독립시킨다. 그러면 ‘호흡절’에서 ‘예비수행’과 구분한 ‘본수행’의 과목은 아래와 같다.

물론 호흡명상에 대한 이런 4단계의 수행과목은 분명하게 경전에 근거하지만, 붓다 자신보다는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경전에 대한 ‘해석된 체계들’이다. 기존의 이해방식이나 새로운 해석들은 비록 경전에 근거하지만, 경전의 말씀[聖言量]을 새롭게 해석하는 문제[比量]인 까닭에, 좀 더 심중하게 현실적인 경험적 근거[現量]를 확보하는 작업이 요청이 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전통적 해석이니까 여기에 따르라는 해석보다는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면 좋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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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문다. 그는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그리고 그는 안과 밖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나) 또한 그는 몸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리고 몸에서 발생과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다) 또한 (단지) "몸이 있다"고 하는, 지금 이것으로부터 알아차림이 그에게 현존한다. 단지 그러는 한에서 오직 (온전한) 지혜가 있고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세상에 의존하는 바 없이 머물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무는 것이다.

이 구절은 염처경의 후렴구(refrain)이다42. 후렴구라고 부르는 이유는 몸/느낌/마음/현상에 관한 법문이 끝나는 지점에서 13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것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몸/느낌/마음/현상을 관찰함으로써, (가) 무아(無我), (나) 무상(無常)과 (다) 고통에서 자유로운 열반(涅槃)이라는 삼법인(三法印)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1. 안팎으로 대상관찰, 무아(無我)의 통찰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문다. 그는 밖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그리고 그는 안과 밖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Iti ajjhattaṃ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여기서 첫 번째 쟁점은 ‘안(ajjhatta)과 밖(bahiddhā)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한다.’고 할 때, 몸에서 안과 밖이란 어떤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앉아서 좌선 공부를 할 때, 엉덩이의 압박감이나 다리의 저림을 느낀다면, 이것은 밖인가? 안의 경험인가? 하는 문제이다. 경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아비담마 불교(淸淨道論)에서는 내적 관찰은 수행자 자신을, 외적 관찰은 타인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43. 이런 해석은 알아차림 명상수행이 개인적인 측면에 한정하지 않고, 타인을 인식하는 외적 사회적인 관계로까지 확산하는데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눈을 감고 호흡 명상한다고 할 때, 밖의 타인을 관찰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44.

현대적 논의에서, 느낌관찰을 강조하는 Goenka는 안/밖의 기준을 피부로 삼는다. 내적인 충동(saṅkhāraṃ)이 밖(surface)으로 드러남이기 때문이다45. 외적인 관찰은 몸과 같은 피부에서 관찰되는 몸 느낌과 같은 종류이고, 내적인 관찰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움직임, 느낌들, 생각들을 가리킨다. 이 경우는 좀 더 현실적인 해석이다. 밖에서 오는 자극은 외적인 관찰로,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은 내적인 관찰로 본다.

필자는 외적인 부분을 타인을 비롯한 사회적인 관계로 확장하는 청정도론의 관점에 동의를 하면서도, Goenka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호흡명상에 한정해서 보자면, 타인의 호흡을 관찰하거나 동작이나 표정을 관찰하는 것 역시 명상수행으로 보는 것은 명상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반면에 내적인 눈으로 호흡을 관찰한다는 좁은 의미로 한정해서 본다면, 외적인 것은 엉덩이의 압박감이나 다리의 저림처럼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기에 ‘밖’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망상이나 졸음은 내적인 관찰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로 안/밖의 쟁점에서 중요한 철학적 의미는 바로 안/밖 그리고 그 중간 어디에도 ‘나’라고 할 게 없다는 통찰이다. 안/밖의 관찰을 설하는 경전의 의도는 분명하게 바로 무아(無我)의 통찰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관찰을 통해서 안에도, 밖에도, 그들의 중간에도, 어디에도 ‘나의 존재’를 증거 하는 그 어떤 대상도 발견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안/밖에 대한 관찰의 궁극적인 취지임을 확실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2. 무상성(無常性), 발생과 소멸의 관찰

또한 그는 몸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따라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 그리고 몸에서 발생과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몸에 머문다(samud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여기서 몸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무엇일까? 이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논의한 언급한 일체의 현상이 여기에 속한다. 이를테면 길고 짧음, 안과 밖, 들숨과 날숨, 거칠고 고요함 등이다. 이런 후렴구는 몸뿐만 아니라, 이후에 진행되는 느낌/마음/현상(法)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도 적용된다.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개별적인 대상, 사물의 발생[生]과 소멸[滅]에 대한 sati이고, sampajāna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보편적인 ‘연기법(緣起法)’을 관찰하는 것이다. 특정한 몸이나 느낌과 같은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그것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성(무아나 무상)을 통찰하는 일은 결코 쉬운 명상작업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을 통해서 연기법을 자각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명상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어려운 통찰도 첫걸음부터 차근차근 해간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 첫걸음이 호흡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감은 그 자체로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상징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숨이 들어오면 발생이고 숨이 나가면 소멸이다. 발생과 소멸은 계속 반복되면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의 본질, 곧 무상성에 이른다. 처음에는 호흡[身]이지만, 계속하여 느낌[受]과 마음[心], 그리고 현상[法]에 대한 생멸의 관찰 통해서, 연기라는 사물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3. 알아차림과 지혜에 의한 열반(涅槃)체험

또한 (단지) "몸이 있다"고 하는, 지금 이것으로부터 알아차림이 그에게 현존한다. 단지 그러는 한에서 오직 (온전한) 지혜가 있고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있다(‘atthi kāyo’ 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그럼으로써 그는 세상에 의존하는 바 없이 머물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무는 것이다(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Evam·pi kho,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위 부분에서 엄격하게 보면 두 개의 문장이다. 첫 번째 문장은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의 번역이다. 여기서 ‘pan·assa’를 ‘pan’은 지금 현재로 번역하고, ‘assa’는 idaṃ의 탈격으로 ‘이것으로부터’ 번역하였다. 곧 ‘단지 몸이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수행자에게 알아차림이 여기에 현존한다.’는 의미가 된다.

두 번째 문장은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의 번역이다. 여기서 필자는 ‘yāvadeva’를 관계대명사와 같이 선행사를 제한하는 한정사로서 ‘단지 그러는 한에서’로 번역한다. 곧 바로 앞의 ‘단지 몸이 있다’고 알아차림이 ‘현존하는 한에서’, 그곳에는 ‘온전한 지혜가 있고,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존재한다고 의미로 번역한다.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에는 단지 몸이 존재할 뿐, 그곳에 다른 불순물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대응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은 대상을 향하여 ‘불타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인식하는 수단으로는 인도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성언량(聖言量)과 비량(比量)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구절은 오직 직접적인 체험, 현량(現量)만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전거이다. 자신을 포함하여 대상을 인식할 때, 성언량의 인식의 편견이나 추론에서 오는 비량의 오류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이곳에 있다. 성언량을 인정하면 종교 간에 서로 심각한 편견을 제거할 수 없고, 비량을 인정할 경우에 잘못된 추론을 함께 인정해야하는 곤란함에 빠지기 때문이다.

몸에 대해서 단지 ‘그 몸’이 있다고, 느낌에 대해서는 단지 ‘그 느낌’이 있다고, 마음에 대해서는 단지 ‘그 마음’이 있다고, 현상(法)에 대해서는 ‘그 현상’이 있다고, 순수하게 알아차림하고 지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몸(느낌, 마음, 현상)’과 ’그 몸(느낌, 마음, 현상)’을 구분하였다. 전자는 과거나 미래에 걸쳐서 존재할 수 있는 ‘보편자로서’ 몸이고, 후자는 ‘단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는 ‘개별자로서’ 특정한 몸이다. 전자는 sampajāna, 곧 비량(比量)의 대상이라면 후자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sati, 곧 현량(現量)의 대상이다. 보편자[共相]로서 비량의 대상인 ‘몸’은 그 자체로 지각이나 관찰이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오직 지금 여기의 개별자[自相]로서 ‘이 몸’만이 관찰의 대상이 된다. 이때야 비로소 안/밖을 관찰하여 무아의 통찰과 생멸을 관찰하여 무상성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러는 한에서(yāvadeva)’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는 한에서’ 온전한 지혜가 생겨나고,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그것에 있게 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알아차림’이 두 번 계속적으로 사용된 점이다. ‘여기에 몸이 있다고 하는 알아차림이 현존하는 한에서, 오직 지혜와 알아차림이 있다’고 할 때, 결국은 알아차림(sati)이 겹치게 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미 알아차림이 현존하는데 다시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필자는 이점을 명상 수행자의 수준, 곧 서로 다른 수준의 알아차림이 있다고 가정을 한다. 첫 번째의 알아차림은 일상에서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때는 욕계의 편견과 추론의 오류를 벗어난 순수 현량으로서의 사띠, 알아차림이다. 두 번째는 sampajāna, 알아차림의 ‘알아차림’으로서 상위의 위빠사나적 자각이고, 선정상태에서 ‘제3선의 견고한 알아차림’이다. 이렇게 보면 알아차림은 알아차림을 더욱 강화하여 깊은 선정으로 이끄는 동력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그는 의존한 바 없이 머물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머문다.’는 것에 도달하게 된다. 이 구절은 대승불교에서 널리 유통된 금강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것과 동일한 관점이다.

Ⅵ. 결론

본고는 대염처경의 호흡절에 대한 ‘과목 나누기’라는 체계적 해석방법을 통해서 호흡명상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이것은 기존의 남방 상좌부 전통적 해석을 검토하면서, 대염처경입출식념경에 나타난 ‘호흡절’을 중심으로 초기경전 자체의 구조와 체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본고는 전체 호흡절의 과목을 ‘예비수행 4단계’, ‘본수행 4단계’, ‘비유적 설명’, ‘후렴구’로 분류한다. 예비수행은 다시 ‘준비’, ‘자세점검’, ‘기준점 설정’, ‘단지 호흡 알아차림 하기’ 4단계로 구분하고, 본수행을 남방 전통적 해석에서는 ‘긴 호흡의 앎’, ‘짧은 호흡의 앎’,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으로 4단계로 나누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과목을 나누는 해석체계와 실제로 수행하는 수행체계를 서로 분리하여 이원화시킨다. 다시 말하면 과목나누기는 기존 해석체계를 따르지만,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기존해석과 다르게 ‘긴 호흡의 앎’과 ‘짧은 호흡의 앎’을 하나로 묶고, ‘~겠다 호흡명상’을 별도로 독립시켜서 수행하도록 구별하였다. 그리고 ‘비유적 설명’은 따로 세분하는 코딩 분류는 하지 않았고, 후렴구는 ‘안팎의 무아 관찰’, ‘생멸의 무상 관찰’, ‘알아차림과 지혜’, ‘열반체험’으로 코딩하였다.

각 단계별로 새롭게 해석한 중요한 쟁점주제어를 살펴보면, 호흡명상 예비수행에서 ‘준비’에서 ‘떠남’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출가주의’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고, 명상수행을 하기 위한 ‘환경설정’으로만 이해하였고, ‘자세점검’은 단순하게 명상을 위한 준비로서 자세를 점검한다는 것보다는 ‘자세점검’을 명상수행의 일부로서 파악하였고, 쟁점이 되어온 ‘면전(parimukhaṃ)’에 대해서는 ‘기준점 설정’으로 해석하였다. 신체의 특정한 지점을 결정하지 않고 각각 수행자에게 적절한 지점을 설정하게 개방하였고, 특히 호흡의 표상(nimitta)과 관련하여 해석하였다. ‘단지 호흡 알아차림 하기’는 본수행에 배열 않고 호흡에 대한, ‘순수한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예비수행에 넣었다.

본수행에서 남방전통 해석과는 다르게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을 하나로 묶어서 해석하였다. 현장에서 호흡의 길이보다는 거칠고 부드러운 상태를 보다 잘 자각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여기서는 알아차림, ‘sati’와 분명한 앎, ‘saṁpajāna’의 차이점에 대해서, 비언어/언어적 판단, 일차/이차적 인식, 대상자각/상위자각, 개별대상/보편대상 등의 차이점을 열거하고, 먼저 sati가 있고, 그런 연후에 saṁpajāna가 뒤따르는 일반적인 선후관계와 함께 그 반대의 경우도 경전에서 사용함을 밝혔다.

다음으로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에서 ‘몸 전체(sabba-kaya)’는 호흡의 처음, 중간, 끝이란 해석과 함께 들숨과 날숨 양자 모두, 그리고 몸의 땀구멍이란 기존해석을 소개하고, 이들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수행의 깊어지면서 순차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말하고,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에서 몸의 조건(kāya-saṅkhāraṃ)이란 전통적 해석에 따라서 ‘호흡’이라고 보지만, 본고에서는 몸의 열기나 긴장감과 같은 몸의 조건으로 확장하여 ‘이완하면서’로 해석한다. 한편으로 호흡명상의 본수행 4단계를 4선정에 배대하는 유부계통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의 해석을 소개했다. 그러나 필자는 공감은 하지만 해석의 타당성 확보를 위한 경험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본수행에서 필자는 기존에 해석하지 않았던 ‘~겠다 호흡명상’을 새롭게 신설하였다.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이라는 불교인식론의 근거해서,’~겠다 호흡명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대염처경은 ‘sati’와 ‘saṁpajāna’의 체계지만, 입출식념경은 ‘sati’와 ‘saṁpajāna’뿐만 아니라, ‘~겠다고 훈련하는’ 호흡명상이 전체의 88%를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후렴구는 ‘안팎의 무아 관찰’, ‘생멸의 무상 관찰’, ‘알아차림과 지혜’, ‘열반체험’으로 코딩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특징을 설명하는 삼법인(三法印)에 부합한 교설임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이상으로 대염처경입출식념경에 나타난 호흡명상의 성격을 해석학적 접근방식으로 고찰하였다. 오늘날에 필자는 전통적인 해석을 충실하게 따를 것인가, 아니면 창조적으로 새롭게 호흡명상의 체계를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존재함을 인식한다. 곧 텍스트주석에서 발생되는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서, 전승된 호흡명상을 오늘날의 현실에 맞도록 재조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다.

국문초록

본고는 대염처경의 호흡절에 대한 ‘과목 나누기’라는 체계적 해석방법을 통해서 호흡명상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이것은 기존의 남방 상좌부 전통적 해석을 검토하면서, 대염처경과 입출식념경에 나타난 ‘호흡절’을 중심으로 초기경전 자체의 구조와 체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본고는 전체 호흡절의 과목을 ‘예비수행 4단계’, ‘본수행 4단계’, ‘비유적 설명’, ‘후렴구’로 분류한다. 예비수행은 다시 ’준비’, ‘자세점검’, ‘기준점 설정’, ‘단지 호흡 알아차림 하기’ 4단계로 구분하고, 본수행을 남방 전통적 해석에서는 ‘긴 호흡의 앎’, ‘짧은 호흡의 앎’,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훈련’, ‘몸의 조건을 가라앉히면서 훈련’으로 4단계로 나누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기존해석과 다르게 ‘긴 호흡의 앎’과 ’짧은 호흡의 앎’을 하나로 묶고, ‘~겠다 호흡명상’을 별도로 독립시켜서 구별하였다. 곧 과목을 나누는 해석체계와 실제로 수행하는 수행체계를 서로 분리하여 이원화시킨다. 그리고 ‘비유적 설명’은 따로 세분하는 코딩 분류는 하지 않았고, 후렴구는 ‘안팎의 무아 관찰’, ‘생멸의 무상 관찰’, ‘알아차림과 지혜’, ‘열반체험’으로 코딩하였다. 오늘날에 전통적인 해석을 충실하게 따를 것인가, 아니면 창조적으로 새롭게 호흡명상의 체계를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존재함을 인식하면서, 필자는 텍스트주석에서 발생되는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서, 전승된 호흡명상을 오늘날의 현실에 맞도록 재조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주제어

대염처경, 호흡명상, 남방불교, 초기불교, 해석학

Footnote

1)  해석학이란 용어는 경전의 주석, 문헌학의 방법론, 정신과학으로서 해석학, 실존의 현상학으로서 해석학, 체계로서의 해석학 등으로 분류된다. 필자가 여기서 채택한 개념은 경전의 주석, 문헌학의 방법, 그리고 체계로서의 해석학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이것과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리차드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2004’를 참고바람.

2)  천정은(2018), ‘호흡명상 연구 동향과 과제’, 명상심리상담20권.

3)  김형록(2013), ‘알아차림 명상의 치유적 효과: 단일사례연구’, 질적연구14(2), pp.105~121. 김형록(2015), ‘호흡명상의 심리 치유적 효과-영상관법에 의한 상담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불교학 75, pp.323-355.; 김형록(2018), ‘부정관법의 한계와 호흡명상의 치유적 기능’, 선문화연구 25, pp.7~44.

4)  이필원, (2016), 초기불교의 호흡 명상법에 대한 고찰 -호흡명상의 다양한 위상을 중심으로’, 불교학연구 제47호, pp.109∼134.

5)  물론 이 부분은 호흡연구의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2000년대로 앞당겨야 한다. 정준영, ‘대념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 불교학연구 제7호, 2003.

6)  홍원사편(2005), ‘대념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 홍원사.

7)  홍원사편(2005), ‘입출식념경의 수행이론과 실제’, 홍원사.

8)  한국명상심리상담학회(2007), 명상심리상담(당시 명상치료) 창간호, 명상상담연구원.

9)  정준영(2014), ‘호흡명상의 실천방법에 대한 재고: 초기불교와 상좌부불교의 입출식념을 중심으로’, 명상심리상담 제12집. pp.43-55.

10)  이필원(2016), 앞의 논문, pp.109∼134.

11)  ‘과목나누기’란 용어는 경전이나 논서를 공부를 할 때, 매우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30년 전 필자는 이것을 조선시대 이후로 승려교육을 담당하는 전통강원에서 공부할 때, 처음 들었던 용어이다. 그러나 ‘과목나누기’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아마도 현실적인 유용성으로 문헌연구가 약화되면서 그렇지 않았나 생각한다.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성경을 장절로 분류하는 작업과 출판하는 간행은 오랜 문헌 해석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향한 해석학적 논의로서, 그 정당성과 효용가치는 앞으로 연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12)  http://www.buddha-vacana.org/sutta/digha/dn22.html

13)  인경스님(2012), 명상심리치료, 명상상담연구원, pp.119-200.; 임승택(2005), 앞의 논문, pp.10-48. 김재성(2005), 앞의 논문, pp.63-86. 김홍미(2007), 앞의 논문, pp.19-22. 이필원(2007), 앞의 논문, pp.24-27.

14)  PTS, DN22, Katha·ñ·c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15)  PTS, DN22,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 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 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 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16)  PTS, DN22, Seyyathāpi, bhikkhave, dakkho bhamakāro vā bhamakār·antevāsī vā dīghaṃ vā añchanto 'dīghaṃ añchāmī' ti pajānāti; rassaṃ vā añchanto 'rassaṃ añchāmī' ti pajānāti;

17)  PTS, DN22, Iti ajjhattaṃ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samud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atthi kāyo’ 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Evam·pi kho,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18)  이 논의는 입출식념경의 수행을 예비수행이고, 토대수행이라는 김재성(홍원사편, 앞의 논문, p.72, p.75.)의 견해에 대해서, 일중스님이 입출식념경의 수행은 예비수행이 아니고, 이미 본수행이라고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다(홍원사편, 앞의 논문. p.90.).

19)  이필원(2014), 앞의 논문, p.130.

20)  Khuddakanikāye Suttanipāto(Sn71), “Sīho ca saddesu asantasanto Vāto va jālamhi asajjamāno, Padumaṃca toyena alippamāno,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21)  이것은 대표적으로 平川彰의 입장으로서, 대승불교를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불교, 혹은 재가불교의 기원설을 주창하면서, 출가와 재가를 대립시키면서 상좌부에서 강조하는 떠남(出離, niyyāna)을 비판하는 경우를 가리킨다(平川彰, 初期大乘佛敎の硏究, 春秋社, 1968.). 그러나 이런 견해(국내에서 민족사에서 1992년에 번역 출판했던 대승불교시리즈)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다룬 일본학계의 성과물을, 약 25년이 지난 이후 이번에는 씨아이알 출판사에서 중심이 되어서 2016년에 번역 출간한 대승불교시리즈1,2,3를 참고바람.

22)  PTS, DN22, Ekāyano ayaṃ, bhikkhave, maggo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23)  홍원사편(2005), 앞의 책, p.225.

24)  Goenka(1999), Discourses on Satipaṭṭhāna Sutta, Igatpuri, Vipassana Research Institute., p.28.; 일중스님, ‘고엔카 수행법과 대념처경’, 홍원사편(2005), p.117.

25)  Anālayo(2003), Satipaṭṭhāna: The Direct Path to Realization, Cambrige, p.129; 이필원외 공역(2014), 깨달음에 이르는 알아차림 명상수행, 명상상담연구원, p.145.

26)  김재성(2005), 앞의 논문, p.157. 정준영(2014), 앞의 논문, p.48.

27)  Nyanatiloka MahaThera, Buddhist Dictionar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2004. 여기서 니밋따를 ‘반영된 이미지’, ‘카르마의 표식’, ‘외형적 형상’, ‘감각기관의 대상’, ‘존재의 조건’ 등으로 나열한다.

28)  이창규(2017). ‘초기경전에 나타난 니밋따(Nimitta) 연구’, 불교학연구제53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p.200. 여기서는 니밋따를 감각에 나타난 형상, 원인, 심상의 세 종류로 분류한다.; 이창규(2019), ‘초기경전의 니밋따에 대한 이해와 선정수행 연구-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sati)를 중심으로’.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29)  홍원사편(2005), 앞의 책, p.227. parimukhaṃ에 대해서, 필자의 사회로 이루어진 종합토론에서 일중스님은 고엔카의 입장을 피력하고, 임승택 교수는 빠띠삼비다막가의 입장에서 코끝이나 입언저리를, 김재성교수는 아랫배라는 마하시선원의 입장으로 반면에, 재연스님은 거울을 마주보는 것 같은 ‘현전’으로, 미산스님은 명상대상으로, 당시 초청된 우 빤디따 사야도는 어떤 대상이든지 마주해서 보는 것으로 의견을 냄. 최근에 정준영(2014), 앞의 논문, pp.47-49. 여기서도 ‘parimukhaṃ’에 대해서 전통 아비담마의 논서와 현대수행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상세하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특정한 위치를 고정시키지 않는 쪽으로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30)  Sayadaw U Sīlānanda(2002), The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 심준보 옮김, 보리수선원, 2003, p.73., 여기서 4종류의 sampajāna를 설명한다. 그것은 행위 이익, 적절성, 수행에 대한 분명한 앎, 지혜로움에 대한 앎이다.

31)  Branislav Kovačević(2019), Sabbakāyapaṭisaṃvedī: A Breathing Meditation Puzzle, https://hcommons.org/deposits/item/hc:25237, June 2019

32)  Buddhaghosa, The Path of Purification(Visuddhimagga). Trans. Bhikkhu Ñāṇamoli.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1), pp. 266-67.

33)  임승택(2000), Patisambhidamagga(無碍解道)의 修行觀 硏究 :들숨ㆍ날숨에 관한 논의(Anapanakatha)를 중심으로, 東國大學校 大學院, 국내박사논문; 임승택(2001), 빠띠삼비다막가 역주, (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p.439.

34)  Buddhadasa Bhikkhu, Mindfulness with Breathing: Unveiling the Secrets of Life: a Manual for Serious Beginners, Trans. Santikaro Bhikkhu, Boston: Wisdom Publication, 1997, p.57.

35)  大毘婆沙論(T27, 136a), “何故乃說我覺遍身 入出息耶 答息念未成 觀入出息從鼻入出 息念成已觀身毛孔”

36)  뇌호흡은 뇌가 호흡을 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분명하게 뇌호흡이 동양에서 말한 뇌의 氣라는 에너지 흐름을 말하는지, 아니면 서구의학에서 말하는 뇌파의 움직임을 말하는지, 아니면 상상력을 통한 고객의 집중력을 성장시키는 교육활동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어느 쪽이든지 ‘뇌호흡’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호흡명상은 전혀 다른 활동이다. 그러면 땀구멍이 숨을 쉰다는 의미는 마찬가지로 호흡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어떤 의미인지 경험적인 자료가 았어여 한다는 말이다.

37)  PTS, Pali-English dictionary,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

38)  Buddhaghosa, ibid, CH.VIII.9. p.286.; 위숟디막가, 범라옮김(1999), (서울: 화은각), p.452.

39)  Buddhadasa Bhikkhu, ibid, p.59.

40)  大毘婆沙論, 앞의 책, p.136. “止身行者 謂令息風漸漸微細乃至不生 應知此中念入出息者是總 念短入出息等是別 復次念入出息者是欲界持息念 念短息者是初靜慮 念長息者是第二靜慮 覺遍身者是第三 靜慮 止身行者是第四靜慮”

41)  Tse-fu Kuan, Mindfulness in Early Buddhism. London: Routlege, 2008, pp.71-72.

42)  Anālayo(2003), ibid, p.92.

43)  Buddhaghosa, ibid, p.110.

44)  정준영(2003),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 sutta)에서 보이는 수념처(受念處)의 실천과 이해’, 불교학연구7호, 183~242쪽. 여기서, 저자는 내적인가, 외적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매우 깊게 기존의 의견들을 차례로 비판적으로 고찰한 이후에, 외부를 타인으로 하는 해석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낸다.

45)  S. N. Goenka, ibid, pp.39.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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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최경자(일상), 불교의 호흡법에 관한 연구: 초기불전부터 대승유식문헌까지, 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 2017.  

41 Branislav Kovačević(2019), Sabbakāyapaṭisaṃvedī: A Breathing Meditation Puzzle, https://hcommons.org/deposits/item/hc:25237, June 2019  

42 PTS, Pali-English dictionary,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 http://www.buddha-vacana.org/sutta/digha/dn22.html